<일 포스티노>
삶으로 가르친 것만 남는다

by N잡러

“하늘이 운다면 그게 무슨 뜻이지?”

“비가 오는 거죠.”

<일 포스티노> 영화에서 시인 네루다와 우편 배달부의 대화다. 은유에 대한 예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어떻게 시인이 되는지 묻는 우편 배달부에게 네루다는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을 감상해 보게.”라고 말한다. 마리오는 그럼 은유가 떠오를까요? 라고 다시 묻고, 시인은 그리될 거라고 답한다.


은유가 무엇인지 아주 적절한 예이다. 평소에 은유를 많이 사용하나? 대부분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만약 주변에서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표현이 특히 말하는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은유라면 뭔 말이야 라며 짜증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우리는 은유를 많이 쓰고 있다. 장마철엔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다.’라고 하고 몹시 덥고 뜨거운 날엔 ‘머리가 벗겨질’이란 표현을 한다. 날씨와 관련된 은유는 관용구처럼 사용하고 있다.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은유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은유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잘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산에서 구름풍경을 보면서 “구름이 잠을 자요.”라고 했다. 누가 은유에 대해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말이다. 그럴 때 놀라고 감동을 받는다. 그러고 보면 느낌대로 말하는 게 은유일 수 있다. 오히려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고 은유에 대해 알려주면 억지로 멋있어 보이는 은유적 표현을 한다.

시인 네루다는 그래서 해변을 걸으며 주변을 감상해 보라고 했나. 어쩌면 인간은 몸속에 자신도 알지 못한 ‘은유’를 지니고 있지 않나 싶다.


영화에서 우편 배달부는 시인에게 여러 질문을 한다. 그런데 특이한 건 시인이 바로 답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질문을 하거나 다음에 답을 하겠다고 한다. 그 장면을 보며 『무지한 스승』이 생각났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 프랑스인이 네덜란드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는데 교수는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모르고 학생은 불어를 할 줄 모르지만 교재를 선정해서 수업을 한다. 교수는 자신은 ‘무지한 스승‘을 자처하고 설명해주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재의 네덜란드, 프랑스 대역본을 스스로 비교하며 읽고 익혀 프랑스어로 작문 숙제를 훌륭히 해낸다. 우리는 교수자가 학습자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며 교수자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학습자가 스스로 학습하겠다는 동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교수자 없이도 배움이 가능하다. 물론 교수자가 옆에서 동기와 자극이 될만한 것들을 제공해야 한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아.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 뿐이야.“


시인 네루다의 대사예요. 직접 경험해 보는 것, 교수자도 설명이 아닌 삶으로 가르친 것만이 남는 것이다. 교수자는 꼭 학교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동년배의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표현도 있다. 이 말을 들으면 교육자로 사명감과 삶의 태도를 바로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교육은 결국 삶을 바꾸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느꼈다. 시인과 우편 배달부의 짧은 만남이 이후 그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삶 자체가 변하게 된다. 처음에 어부의 삶과는 맞지 않아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자전거가 있다는 조건에 맞아 시작하게 된 우편 배달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시인보다 멋져 보였다. 섬의 아름다움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녹음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소리들, 심지어 ’별빛이 반짝이는 섬의 밤하늘‘은 소리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한 정치공략으로 섬 사람들을 이용하는 정치인에게도 쓴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교육은 나의 변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화까지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의 입시 위주의 나만 성공하면 된다는 입신 양면의 교육 현실을 보며 교육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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