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나? 나라면 “독특하게 사는 게 어떤 건데? 남과 다르게 사는 걸 말하는 거야?”라고 되물을 것 같다. 어떤 이는 “평범한 게 최고지. 평범하게 사는 것도 어려워.” 또 어떤 이는 “독특하게 살고 싶지. 그런데 그거 고생하는 거 아니야?” 라고도 하겠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현재를 즐기라며 카르페 디엠을 외치고 인생을 독특하게 살라고 한다. 미국의 전통 있는 명문 고등학교 학생들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명문대학 진학이 목표인 부모에 의해 주입되고 키워진 학생들에겐 신선하고 가슴 뛰는 말이었을 수 있다. 입시 위주의 획일화된 교육, 의사, 변호사, 은행가의 자제로 구성된 학생들…. 한국에서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기를 누렸던 <스카이 캐슬>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키팅선생의 수업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자신을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으로 불러도 좋다라고 하고, 시와 관련된 교재의 서문을 찢어서 휴지통에 버리도록 한다. 영어과목 즉 국어과목 수업인데 운동장에 나가 걸어보라고 시키기도 하고 축구공을 차며 시의 한 구절을 소리 높여 외치라고도 한다. 심지어 교탁 위에 올라가 세상을 보라며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 해. 바보 같고 틀린 일처럼 보여도 시도를 해봐야 해.”라고 말하고 학생들에게도 교탁 위에 올라서 보게 한다.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아마 키팅 선생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태어났다면 소크라테스처럼 사약을 받고 처형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을 선동한 죄로 말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59년은 미국 사회가 혼란의 시기였다. 히피 문화가 생겨나고 반항적 성향이 짙은 로큰롤이 유행하고 로자 파크와 마틴 루터킹과 같은 인권운동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웰튼 사립학교는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100년동안 시간이 빗겨간 것처럼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집안에선 명문대학의 의과대학을 진학해서 장래를 보장받으려고 무리해서 학교에 진학시키지만, 아들은 의사보다는 연극을 하며 살고자 한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부모들의 대사는 한결같다. “취미로 해라.”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 명문대 진학이 답인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축복의 말인 것을 보면 풍파나 위기 없이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걸까? 꽃길만 걷기 위해선 경제적 안정은 필수이고 남들보다 우위에 서야 하는 삶이어야 가능하다. 독특한 삶을 살면서 안정적인 삶이 동시에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그러긴 쉽지 않을 것 같다.
키팅 선생님은 독특한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 못해서 학생들에게 독특한 삶을 살라고 했을까? 키팅 선생님도 웰튼 고등학교 선배이니 거의 비슷한 교육을 받았을 텐데 학창시절 비밀모임을 만들고 시를 낭송했다고 했다. 키팅 선생은 학교 교육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학생들에게 작은 불씨 하나를 던져주고 결국 쫓겨나게 된다.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나서 이후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만약 한국에 키팅 선생과 같은 선생님이 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된다. 소심한 학생에게 눈을 감고 감정을 부치기며 느낌을 말하게 하는 장면은 시란 가슴을 뜨겁게 하면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교과서 서문의 내용인 훌륭한 시란 정의도 시를 오디션처럼 점수를 준다는 것으로 비유하며 찢어버리라고 한다. 선생이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의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하는 사람이고 자기만의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는 영화였다.
슬픈 것은 영화가 개봉되었던 1989년이나 지금이나 감동을 준다는 것인데 교육 현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꽃길만 걷길 바라지 말고 자갈길이든 꽃길이든 본인이 선택한 길이어야 행복한 길이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결국 독특한 삶을 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