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고 돌고
시작은 부정의 감정이다. 본능적으로 깔려있는 것. 떠오르는 물음표는 '왜?', '어째서?'와 같은 종류의 것들뿐이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 한동안 기둥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동안 해온 것에 대한 자부심도 곁다리로. 그렇게 조금 버틴다. 가만히 기다리며. 어차피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거라는 망상과 함께. 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현실을 마주하는 수밖에.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마음은 초조해진다.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던 날과 정 반대의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버린다. 그것도 며칠이다. 이대로 잠식되어버리면 망가질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이미 수차례 망가져봤기에 또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방을 치운다. 옷을 버리고. 책을 주변에 나눠준다. 달리기를 하고 산에 간다. 이토록 괴롭고 긴 여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아지는 상황으로 종료된다. 마침내.
오늘 달리기를 했다. 오랜만이라 얼마나 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1키로는 무난하게 뛰었다. 2키로 부터는 인터벌로 운동장 한 바퀴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걷고를 반복했다. 3키로는 그냥 걸었다. 몸이 많이 무겁지는 않았는데 심폐가 따라주지 않는 느낌이다. 딱 십년 전에 처음으로 각잡고 달리기를 했던 날, 10키로를 쉬지 않고 뛰었다. 그때 하늘을 날아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다리가 내 뜻과 상관없이 뛰고 있는 느낌. 빨간 구두처럼. 머릿속은 깨끗했다. 아무런 생각이 떠돌지 않는 투명한 뇌로 가득 찬 것 같은.
피폐해지는 정신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달리기는 투명한 뇌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발이 지면에 번갈아가며 떠오를 때부터 생각이 시작된다. 지금의 상태, 이번 주에 해야 할 일. 내 마음가짐 등등. 어떤 생각에 깊게 빠지면 달리는 거리에 신경 쓰지 못할 때가 있다. 정신 차려보면 키로수가 늘어나 평소보다 더 가뿐하게 뛰는 것 같은 꿀맛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은 아니었지만. 생각의 가지는 끝도 없이 뻗어나가 떠난 지 1년 반쯤 되어가는 내 고양이 인성이까지 떠올렸다. 7.5kg의 돼지 고양이었던 시절의 인성이를 품에 안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과 낑낑거릴 정도로 꽉 껴안았던 압력. 내려달라고 발버둥 치던 힘. 걸어오다가 갑자기 옆으로 벌러덩 눕는 나태함. 숨 쉴 때 오르내리던 배. 인성이는 2kg 남짓한 몸무게로 나를 떠났다. 인성이가 갑자기 떠오르면 상황과 상관없이 울음이 터지기도 한다.
인성이가 있을 때는 인성이 사료값만 벌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저 귀여운 생명체만 건사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는 마음으로 부정의 감정을 누르곤 했다. 인성이는 떠났고 난 이제 책임질 것이 없다. 이제 겨우 3월이 끝났을 뿐이고 나로서는 아직 시작도 안한 느낌이다. 선택받아야 돈을 벌 수 있는 프리랜서의 삶이란 이런 것들 따위의 반복인 것이다.
달리기를 개시했으니 이제 산에 갈 차례다. 맑음이 예정되어 있는 목요일에 월출산에 가고 싶다. 뜨거운 햇살 맞으며, 흐르는 땀 닦으며 '마침내'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