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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소중한 것들

아빠가 우주를 보여준 날

by 하이데어

"어느 날 아빠가 나에게 우주를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과 함께 읽을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동화책 속 주인공 아이는 '우주를 보여주겠다'는 아빠를 따라 밖으로 나선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동네 철물점도 생선 가게도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아빠를 따라 도랑을 건너고, 언젠가 와봤을 들판에 멈춰 선 아빠가 묻는다.


"우주가 보이니?"


아이의 눈엔 돌 위를 꼬물꼬물 기어가는 작은 달팽이가 보이고,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보리가 보인다.그리고 작은 웅덩이 안에 비친 하늘을 올려다보는 아빠의 얼굴도 보인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아이는 속삭인다.


"네, 아빠. 우주들이 보여요."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아이를, 아빠는 깨워낸다.


"어이, 꼬마 친구! 우주를 보려면 하늘을 봐야지!"


아빠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본 아이의 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반짝이는 별들을 마주한다. 한껏 주인공 아이의 눈빛을 따라가던 여섯 살 아들이, 책장을 넘기자 펼쳐진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고는 "우와.."하고 감탄을 내뱉는다.

'아빠가 우주를 보여준 날' 울프 스타르크 글, 에바 에릭슨 그림 (크레용하우스)


"우주는 정말 넓지? 우주를 보고 있으면 내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진단다."

동화책 속 아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인지, 책을 읽어주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모를 두 아이들이 조용히 귀기울이고 있다. (아.. 내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온 세상은 멈춰있고, 아이들과 나만이 숨 쉬며 같은 상상을 하는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동화책 속 주인공은 그렇게 아빠와의 특별한 추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난 오늘 아빠가 보여준 우주를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책을 덮고, 아이들을 뉘었다. 아이들을 꼭 안고 하루를 무사히 지남을 감사하는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자, 둘째 아이가 조용히 이야기한다.


"나도 아빠랑 우주를 보러 갈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느라, 주말도 없이 늦게 퇴근을 하는 아빠가 생각났나 보다. 아빠랑 손잡고 동네길을 걷고, 깔깔 웃고, 반짝이는 우주를 함께 바라본 주인공 아이가 부러웠을까.


"그래, 다음에 우리 아빠랑 같이 별 보러 여행 가자."


하며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동화책 속에서 아빠는 아이와 무한한 공간의 우주를 바라보았지만, 아이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우연히 밟아버린 개똥 냄새'로, '함께 휘파람을 불며 거닐던 동네 골목'으로 기억할지 모른다.


아이들이 남겨놓는 '추억'은 늘 이런 식이다. 어른들의 기억 속에는 남아있지 않은 아주 작고 작은 사소한 것들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된다. 반짝반짝 크리스마스트리 같던 반딧불이들을 보고 왔던 장면은 사라지고, 돌아오는 길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함께 불렀던 '캐럴'을 기억해낸다. 세계 3대 선셋 중 하나가 눈앞에 펼쳐지던 순간은 사라지고, 엄마가 건네 준 '과자'가 얼마나 바삭하게 부서졌는지를 기억해낸다.


나 역시 그랬다. 퇴근한 아빠의 패딩 주머니 속에 감춰진 바나나를 짜잔하고 꺼내시던 늦은 겨울 밤(당시엔 바나나가 귀했었다..), 취사가 금지된 숙소에 들어가며, 커다란 밥통이 주인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했던 경주 여행, 마당으로 난 길을 따라 주황빛 금잔화를 심으시던 엄마를 내리쬐던 햇빛...


그러고 보니 '나도 아빠와 우주를 보러' 가겠다는 아이가 정말 보고 싶었던 건, 하늘 위 커다란 우주는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빠의 손을 잡고, 같은 공기와 햇빛을 누리는 그 순간을 아이는 원했을 지도 모른다. 아빠, 엄마가 보여주고 싶은 건 커다란 우주지만, 이 작은 아이들에겐 아빠, 엄마와 함께 누리는 소소한 일상들이 커다란 세상이고 우주리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의 첫 장은 그의 아내 앤 드루얀에게 바치는 헌사로 시작한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이 넓은 우주, 영겁의 시간 속, 찰나의 순간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이들의 시선처럼, 끝없는 우주를 앞에 두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오늘도 그렇게 내게 또 하나의 행복을 가르쳐주었다.


*글 속 동화책은 울프 스타르크 글, 에바 에릭슨 그림의 '아빠가 우주를 보여준 날' (크레용하우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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