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바치는 찬가
1월 1일 새해 아침,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둘째가 이불을 걷어내 살피보고는 조용히 투덜거린다.
"어제랑 똑같은데...."
해가 바뀌어 나이를 먹었으니 뭔가 자신의 몸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했었나보다. 아침 식사를 하며 떡국을 한 그릇을 먹었으니, 이제 한 살 더 먹은 형님이 되었다며 신나한다. 새해 아침, 아이가 맛있게 먹고 있는 건 떡국일까, 나이일까.
그러고보니, 언제부턴가 내 나이를 셈할 때 '나이를 먹었다'라기 보다는, '나이가 들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때맞춰 맛있게 '먹는' 나이가 아니라, 낯선 손님을 집안에 들이듯 내심 저어하며 맞이하는 나이여서일까.
지난 여름, 아이들과 함께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을 찾았다. 이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루벤스의 '촛불을 든 노인과 소년' 작품이 있다. 풋풋했을 시절 처음 이 작품을 만나고, 거의 이십여년을 그리워하다 드디어 아이들과 다시 그림 앞에 섰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림 속에서 주름가득한 노파는 얼마 남지 않은 양초의 불꽃 가까이 손을 대고 있다. 그 옆엔 발그레한 볼빛의 소년이 긴 양초를 들고 노파의 불빛을 나눠가지려 하고 있다. 빛과 어둠만큼이나, 주름 가득한 노인의 피부와 벨벳같은 소년 피부가, 허공을 응시하는 복잡미묘한 노파의 눈빛과 호기심으로 가득찬 소년의 눈빛이 강렬하게 대비된다. 노파는 촛불의 온기를 좀 더 오래, 가까이 느끼고 싶어 조심스럽게 더 가까이, 가까이 촛불에 손을 다가가본다. 이만큼 초가 남을 때까지 누려왔던 것들,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스쳐지나 가는 걸까. 노인에게서 나눠가질 불빛을 가지고 아이는 어느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려하는 걸까. 흡사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기대에 찬 아이와 나이가 한살 더 들어와 당혹스러운 나의 모습 같기도 하다.
'촛불을 든 노인과 소년'은 후에 판화로도 제작되었다. 루벤스는 그 아래에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Ars Amatoria(사랑의 기술)'에서 인용한 라틴어 문구를 함께 넣었다.
" Quis vetet apposito, lumen de lumine tolli, Mille licet capiant, deperit inde nihil"
(Who can forbid taking light from another light that is near?
A thousand may take from it, yet nothing is diminished thereby.
렘브란트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다시 보면, 수천 번 나누어 주어도 빛 바래지 않는 촛불 처럼, 나누고 나누어도 결코 닳지 않을 지혜, 여전히 어둠을 걷어낼만큼 밝게 빛나는 촛불을 간직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지는 양초, 언젠간 꺼져버릴 불빛에 가까이, 가까이 손을 다가가는 노인의 아련한 눈빛은 곧 사라질 젊음의 계절을 더 뜨겁게 사랑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을 마주하고 있으면, 나이가 들어감을 목도하는 것이 그저 슬픔과 아쉬움만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계절이 얼마나 찬란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바치는 애도가 아닌, 찬가로 나이듦을 바라보게 한다. 내가 이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다.
<소네트 73>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
전엔 예쁜 새들이 노래했지만
이젠 황폐한 성가대석,
추위를 견디며 흔들리는 그 가지들 위에
누런 잎들 하나 없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계절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해가 진 후 서녘에서 스러지는
그런 날의 황혼을,
만물을 휴식 속에 밀봉해버리는 죽음의 분신인
시커먼 밤이 조금씩 앗아가는 황혼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불타오르게 해준 것에
다 태워져, 꺼질 수밖에 없는
임종의 자리처럼,
제 젊음의 재 위에 누워 있는
그런 불의 희미한 가물거림을.
그대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 사랑 더 강해져,
그대가 머지않아 잃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되리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윤준 엮고 옮김, <영국 대표시선집>(실천문학사, 2016)
그림 속 노파의 마음을 글로 쓴다면,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73 정도가 아닐까. 황폐하고, 누런 잎들이 하나 없는 계절, 점점 어두워지는 황혼의 계절이 다가온다. 머지않아 잃을 수 밖에 없는 이 계절을 더욱 사랑해야겠다. 나이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