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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아,청춘이여!

by 하이데어 Feb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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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청소한다. 평평한 곳이라면 금세 찾아 자리 잡는 먼지도 털어내고, 청소기를 돌린다. 이 집 안에 침입한 모든 먼지는 다 전멸시키기 위한 전투가 시작된다. 하지만 어느새, 소리도 없이 먼지들은 집안 곳곳에 침투하는 데 성공한다.  어쩌면 누군가가 열심히 전투를 치르고 쫓아낸  먼지들이 우리 집으로 피해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야박한 이 집주인도 틈을 주지 않고 밖으로 내쫓는다. 길고 지난한 전쟁이다. 돌고 도는 승자 없는 전쟁이다.
 
 세탁기를 돌린다. 먼지처럼, 빨래도 매일 세탁기를 돌려도 끊임없이 쌓인다. 이것은 누구와의 전쟁 인가. 매일 바닥을 제 집처럼 구르는 아들 탓인가, 미용실에 온 것 마냥 수건을 물 쓰듯 하는 딸 때문인가, 아니면 매일 양말을 신고 출근해야 하는 남편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전인가... 이 또한 승자 없는 전쟁이다. 혼자만의 상상으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나면 잠깐의 휴전이 찾아온다. 누구도 투항하지 않았기에 휴전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잠시나마 깨끗해진 집 안을 둘러보며 빨래를 개고 있으니, 이 또한 행복이지 싶다.
 
 틀어놓은 라디오의 노래가 이제야 들려온다.

"♪어디야 지금 뭐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어디든 좋으니 나와 가줄래
네게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도 많지만
너무 서두르지 않을게
그치만 네 손을 꼭 잡을래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나와 같이 가줄래
너와 나의 걸음이 향해 가는 그곳이
어디 일진 모르겠지만
혼자였던 밤하늘 너와 함께 걸으면
그거면 돼
(별 보러 가자 / 적재)♪"

  산더미 같은 빨래 앞에 앉아, 훈남 연예인의 달달한 목소리를 들으며 설레하는 내 모습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럼 에헤라디야 노동요를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픽 웃음이 났다.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문득 현실로 돌아오면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의 '아줌마'다. 이젠  더 이상 그 누구도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라고 물어봐 주지 않는다. '아... 나에게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혹 있다면 그는 느끼한 불륜남일 것이다' 라는 생각에 또 혼자 픽하고 웃는다. 내 삶에 낭만이 사라졌다.

  낭만(浪漫)의 한자어는 영어 로망(roman/romance)을 한자로 사용하여 음역한 것이다. 중세 유럽의 '로맨스'는 남편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남은 귀부인들에게 들려주던 달콤하고 토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훗날 일본에서 이 로망을 한자로 음역하여 '浪漫 (ろうまん, 로망)'이 되고, 한국은 이 한자를 그대로 가지고 와 '낭만'이라 읽었다. 그럼에도 한자로 풀어보는 '낭만'은 의미가 있다. 낭만은 '물결 낭(浪)'과 '흩어질 만(漫)'이 합쳐진 말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이랄까.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마음, 사랑 앞에 흔들리고, 현실도 사라져 버려 오직 그대만 보이는 마음이 낭만이겠다.
 
  안타깝게도 내 청춘에도 그런 낭만을 가진 로맨티시스트는 곁에 없었다.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혼자였던 밤하늘, 너와 함께 걸으면 그걸로 돼"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연인 한 번 못 만나본 내 가엾은 청춘이여! 그러나 한편으론 그때의 로맨틱한 누군가가 그때의 나에게 마음 담은 로맨틱한 고백을 했다면  손발이 오그라들며 몸서리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 나만을 오롯이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 왠지 부끄럽고 어색했었다. "나와 너의 걸음이 향해 가는 그곳이 어디 일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비관론적 미래에 그의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촉촉한 감성의 소유자, 불확실한 미래, 예민하고 섬세한 남성성을 받아주지 못했던 '시대적' 고정관념이 그때의 많은 로맨티시스트들을 좌절시키고, 현실주의자의 길을 선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로맨티시스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리얼리스트가 된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굳이 젊을 적 누군가가 '로맨티시스트'를 좌절시키지 않더라도, 현실에 치이고 타협하다 보면, 서서히 리얼리스트로 물들어 버린다. 나에게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던 아이 아빠도,  중년이 된 지금은 '탈모약'을 먹어볼까 고민하고, 점점 나오는 아랫배를, 나이 들면 원래 그런 것이라며 외면한다. 무겁게 짊어진 가장의 짐으로 아이들과 아내 앞에서, 섬세하고 촉촉한 마음을 내비칠 틈이 없다. 아이들은 1년 365일 '웃긴' 아빠를 필요로 하고, 아내는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기는커녕, '튼튼한' 성 같은 배우자의 모습을 기대한다. 어디 남자들만 그럴까. 나 역시 '여자의 자존심'이라고 굳게 믿었던 하이힐에서 이 땅으로 내려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자존심은커녕 '자존감'도 정신 차리고  꽉 붙들어야 그나마 '여성성'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섬세하고 예민한 감정의 소유자가 되기보다는 '털털'하고 '무던'한 여성의 길을 택한 지 오래다.

그러니 청춘들이여. 마음의 촉촉한 '낭만'을 지금 미리 포기하지 않기를.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던 마음도 어느새 굳어져버릴 것이다. 바람에 일렁이고 흩어지는 마음은 젊음의 특권이다.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너무도 아쉬워할, 풋풋하고 촉촉한 마음의 흔들림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결코 닿을 수 없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 주겠다는 마음으로 손 꼭 잡고 함께 별을 바라보는 그런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빨래를 개며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를 듣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 청춘이 너무도 부럽다.
 
 봄이 온다. 꽃은 피어난다. 꽃이 피어난다는데 어떤 예감이 들이치면서 우리 가슴께는 미어지게 아프다. 그러니 이 봄이 주는 마음의 부담을 따라 전율해야겠다. 사랑의 혼돈 속에서. 그러다 사랑으로 버틸 수 없는 날에는 사랑의 모순 속에서, 사랑의 중력 속에서 사랑의 두 팔을 꼭 잡고 피겨스케이트를 타야겠다. 아니다. 히치하이킹이란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만 피겨스케이트라는 말을 잘못 써버렸다.
(혼자가 혼자에게, 이병률)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아이들 손이나 잡고 별보러 가야겠다. 혼자였던 밤하늘,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걸으면 그걸로 된다.

 아..... 청춘이여! 낭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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