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에 입성하는 딸을 둔 엄마의 자기반성
언제부턴가 아이의 짜증이 잦아졌다. 예전 같으면 분명 별 일 아니었던 일이 요즘엔 딸아이의 눈시울을 벌겋게 만들고, 아이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있다. 마냥 순하기만 했던 딸아이의 투정이 낯선 엄마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날을 세우고, 서로를 향해 짜증을 쏟아낸다. 우리의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누구보다 순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자부할 정도로 큰 문제없는 아이들이었기에, 아이들에게 크게 화낼 일도 많지 않았다. 엄마라면 모두가 꿈꾸는 평화롭고 우아한 육아.... 어리석게도 그게 나의 육아라 믿었다. 그런 내가 '사춘기 자녀를 둔 학부모의 세계'에 입장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뜨개질을 배우고,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해 하루에도 서너 번, 빈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들고 문 밖으로 나가며, 밤이면 밤마다 집 주변을 몇 번씩 돌고 돌아온다는 신화와 전설이 가득 찬 미지의 세계로 말이다. 사춘기를 지나온 엄마도 사춘기를 둔 자녀의 엄마는 처음이기에 낯설고 두려운 세계다.
그래서일까. 나는 들쑥 날쑥한 아이의 감정을 대할 때마다 발끈하고 화를 내며 아이의 사춘기 입성을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애써 단단하게 쌓아왔던 엄마의 성벽이 아이의 투정에, 성냄에, 눈물에 무너지는 것 같아 더 예민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오늘 아침, 등교를 준비를 하는 아이를 쫓아다니며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냈다. 그리고 나의 잔소리를 받아치는 아이의 태도에 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져버렸다. 아이들을 보내고 고요해진 집에 앉아있으니, 그제야 후회와 걱정이 밀려왔다. 눈시울이 벌게져 돌아선 아이의 뒷모습이 미안했고, '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성질대로 화난 마음을 아이에게 쏟아냈구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이가 사춘기의 터널 속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터널 밖의 엄마와도 방어전을 치르게 할 순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춘기의 긴 터널 입구에 서 있는 지금, 엄마는 정리가 필요하다.
<1>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알코올 중독과 가정 폭력에 닿아 멈췄다. 알코올중독자의 가정 폭력과 나는 무엇이 다른가. 과연 다른가. 술에 취해 가정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은 술이 깨고 나면, 그럴듯한 사과를 건네고 다신 그러지 않으리라 약속한다. 내 감정을 주체 못 해 아이에게 미약하나마 정서적 폭력을 가하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알코올 중독자와는 다르다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여전히 너를 사랑해'라고 쓴 나의 편지와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의 '여전히 당신과 아이들을 사랑해'라는 말은 과연 다른가. 다음부터는 좀 더 다정해지리라 다짐하고 있으니 가정 폭력범보다는 나은 걸까. 그들 역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백번 천 번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욱하며 화를 내는 나를 마주하며 드는 자괴감 또한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구나'라고 후회하는 그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2>
아이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내 마음 깊숙이 잊고 있던 감정들이 떠오른다. 나의 사춘기 시절의 기억이다. 화가 나 있는 엄마를 앞에 두고 '죄송해요'라는 말을 하기 싫어 끝까지 입을 다물고 굳게 서 있던 마음, '이번엔 기필코 엄마를 이겨먹으리라' 다짐했던 그 단단한 마음이 떠 올랐다. 나는 단단했던 엄마의 벽 앞에서 부당함과 무력감을 느꼈었다. 그런 내가 이제 엄마가 되어 더 단단한 벽이 되어 아이 앞에 버티고 서 있다. 나의 성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너의 반항을 기필코 꺾어내리라....
<3>
착한 아이, 순한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스스로 잘 해내는 아이... 돌아보니 모두 나의 통제 욕구가 그려낸 아이의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통제욕의 다른 말은 두려움일지 모른다. 내가 그려놓은 선 밖으로 아이가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아이를 향한 통제욕으로 나타났다. 내 욕심대로 그어놓은 선을 아이가 넘어올까 전전 긍긍했고, 혹 아이가 선에 쓰윽 닿기만 해도 고개 드는 두려움에 벌컥 화부터 냈다.
<4>
나는 아이에게 훈계가 아닌 화를 내고 있었다. 아이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상황에서 나의 감정이 조절되고 있다면 그것은 '훈계'다. 하지만 화(火)는 말 그대로 불이다. 주변에 태울만한 것을 찾아 쉽게 불을 옮겨 붙인다. 그뿐인가. 저 멀리 있는 곳까지 불똥을 튀겨 더 큰 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는 조절되기 않는 분노로 태울만한 것을 모조리 불태웠고, 여기저기 불똥을 튀겨 아침 등교시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연애편지처럼, 슬쩍 편지를 건넸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하루 종일 아이도 우울했을까 봐 걱정했다는 말에, 아이는 학교 정문을 들어가자마자 잊어버렸다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구구절절, 횡설수설하는 엄마에게 스스로 찾아낸 오늘의 상황 정의와 원인, 까닭을 이야기했다. 괜찮다 했지만, 스스로도 꽤 우리의 '다툼'을 돌아본 모양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와 나는 무엇이 다른가부터 시작해 죄책감, 미안함, 자괴감 등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낸 내게, 아이는 이러이러한 상황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했으며 이제 자긴 괜찮다며 엄마를 안심시킨다. 고마웠다.
집에서 화분을 키운다면 때때마다 햇빛을 비춰주고, 창을 열어 바람도 쐬어주며, 물을 주어야 한다. 때때로 더 풍성한 가지를 만들기 위해 가지 치기도 해야 하고, 겨울이 되면 따뜻한 집 안으로 들여야 하는 화분도 있다. 처음엔 작게 시작한 화분이 어느 정도 자라면 분갈이도 해줘야 한다. 위로 자란 만큼, 아래로 더 깊고 풍성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도와주는 작업이다. 아이의 사춘기는 내가 뿌리내린 어른의 세상에 아이도 뿌리내릴 수 있게 옮겨야 하는 분갈이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뿌리를 감싸고 있던 처음의 흙을 쏟아내고 더 기름진 땅으로 아이를 옮겨 주어야 한다. 아이의 모든 시간을 단단히 품고 있었던 엄마의 흙을 털어내야 한다. 이제는 어른의 땅에 뿌리내리고, 나와 함께 햇빛을 쐬고, 비를 맞고, 때로는 태풍도 견딜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육아가 아닌 동행의 삶을 준비하는 우리의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와 가정폭력은 너무도 멀리 간 상상과 반성이었다. 알코올 중독은 술을 끊는 과정에서 경련과 불안 등의 지독한 금단 증상을 겪는다.(너무도 당연하지만) 나의 분노의 후유증은 알코올 중독자와는 달랐다. 아이와의 다툼을 되돌아보며 나는 아이와의 스텝을 맞춰가며 함께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또한 같은 시간을 누리지만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우리의 모습을 처음으로 그려보는 계기의 시간이기도 했다. 분노로 촉발된 후회와 반성은 우리의 관계는 어른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성장하고 있다. 아이도 나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의 밑줄
아이를 언젠가는 떠날 손님이라고 생각하면 아이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진다. 내 맘보다는 아이의 맘을 살피게 되고, 어떻게든 늘 잘해주고 싶고, 단점보다는 장점에 더 눈이 가며, 조그만 호의에도 고마워하게 된다.
그리고 먼 훗날의 이별이 문득문득 떠올라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애잔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소중하게 다가온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아이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삼 모든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아이가 한없이 모자라기만 한 나 같은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면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모습도 새삼스런 감동이다. 혹시라도 아이를 잘못 키우면 어떻게 하나라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그간 아이 키우기의 기쁨과 보람을 잊고 살았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억지로 키우려 애쓰지 않아도 아이는 잘 자라리라는 믿음이 점점 확고해진다. 이렇게 믿음직한 아이를 그동안 몰라보다니 왜 그랬을까. 아이를 키운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일인 걸, 이렇게 쉬운 일인 걸 왜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박혜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