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한 주 앞둔 토요일 아침, 가까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이른 토요일 아침이라, 커피와 간단한 아침을 먹기 위해 카페를 찾은 부부들이 꽤 많이 보인다.
나이가 지긋한 부부의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서로 마주 앉은 채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는 옆 테이블 중년 부부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흰머리 지긋할 때까지 다정한 저들 부부처럼, 나도 아이 아빠와 해로하며 먼 훗날 카페에 저렇게 앉아있으리라 내심 다짐도 했다.
그러다 문득 중년의 부부가 저렇게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릴 일이 무얼지 궁금해졌다. 내 눈은 책을 향하고 있었지만, 내 모든 신경의 안테나는 옆 테이블로 세웠다.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연신 아내는 자신의 핸드폰을 남편에게 들이 밀었다. 음... 재미난 기사거리라도 있는걸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부부는 꽤 오랜 시간 핸드폰을 가운데 두고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든 남자분이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어, 누나!"
오....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남편 분이 나의 답답한 마음에 단비를 내려주리라.
"아무도 카톡에 답을 안 해서 전화했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키워드 하나 - 카톡, 키워드 둘 -가족 채팅방.
"이렇게 다들 모른 척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안 그래도 한 번은 정리해야겠다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정리하자고."
키워드 셋- 해결되지 않은 가족사.
꽤 점잖아 보이던 남자분이었는데, 그 '누나'와 통화를 하는 동안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시선을 책에 붙잡아두고 있지만, 점점 붉어지는 남자분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서 누나는 형네 갈 거야? 결국 형수님이 얘기하는 건, 이번 설까지만 형네서 지내고, 다음부터는 각자 돌아가면서 모시자는 건데.... 우린 못해. 와이프도 곧 복직이고. 다음부터는 설에만 모이고, 추석은 모이지 말든가!"
실망과 동시에 좌절감이 몰려왔다. 지긋한 중년의 노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다정하게 이야기했던 주제가 그 흔하디 흔한 '명절', '제사', '스트레스' 였다니.... 다음 주면 깨끗이 집청소하고, 음식 장만해 시댁 친인척들을 맞이하게 될 '맏며느리'인 나는 절망했다. 어림잡아 2~30년이 흐르는 결혼 생활을 유지한 저 노부부도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옆 테이블 맏며느리의 절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핸드폰을 붙든 남편의 언성이 점점 높아져갔다. 조용히 눈짓, 손짓으로 남편을 코칭하던 아내분은서둘러 짐을 챙기고, 핸드폰과 한 몸이 된 남편을 끌고 나의 세상 밖으로 사라졌다. 관람객에게 찝찝한 결말을 남기고... 남자분과 핸드폰 너머 누나는 좋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렇게 서로 언성을 높이다 서로 서운해하며 전화를 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여러 번 반복된 대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찌어찌 명절을 보냈고, 또 시간이 흘러 그 '명절'이 돌아왔을지 모른다.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은 요즘 MZ세대들을 이해할 수 없어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한 바닥 썰을 풀어낸다. 상사보다 앞선 퇴근은 예의 없는 일이었고, 쉬는 날에 걸려온 상사의 전화가 전혀 불편하지 않은 것마냥 받아내야했던 우리의 초년생 시절을 회상했다. 그리고 부러움과 회한을 담아 친구는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요즘 애들이 똑똑한 거야"
이제 우리 세대는 전화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급한 일에도 문자를 보내고, 6시 땡 하면 이미 문 앞에 나가있는 후배들에게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너그러움을 강요받고 있다. 후배들은 그걸 왜 '너그러움'이라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가정에서도 윗 세대와 아랫 세대의 딱 중간인 나의 세상은 지금 과도기를 겪고 있다. 종손 맏며느리 뱃속의 태아가 딸이라는 소식에 "딸 낳은 사람이 아들 못 낳겠냐, 괜찮아~" 하시던 시어머님의 말씀은 오래오래 서운함으로 남아 있었다. 둘째는 당연한 것인가, 이것은 위로인가, 정말 괜찮으시다는 것인가 등등 수많은 서운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 친구가 자신은 아들이 결혼하면 전화도 안 터지는 무인도로 들어가 며느리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당찬 포부를 내비치자, 그 자리의 동료 며느리들은 격한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먼저 종갓집 며느리셨던 시어머님은 어머님 대에서 '제사'를 끊으셔야 한다며 제기를 모두 내다 버리셨다. 그리고 이번 설, '큰' 아들 집에 모인 가족들은 '배달앱' 맛집에서 신중하게 고른 아귀찜을 맛있게 드셨다. '형님'은 그래도 명절인데 기름 냄새 풍겨야 하지 않겠냐며 새우튀김, 고구마튀김을 사 오셨다. 나는 때때마다 싱크대 앞에 '홀로' 서 있는 며느리가 되기도 했다. 어머님은 해외여행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서방님'네 가족이 오면 한 번 더 모이자고 제안하셨다.
나의 명절은 말 그대로 과도기(過渡期)를 겪고 있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중간 시기. 또는 아직 제도 따위가 확립되지 않아 불안정한 시기. 아직은 때때로 위태위태하지만, 내가 '시어머니'가 될 그 세상은 안정기이기를 바라며 이 과도기를 지나가고 있다. 강요된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울대 정치학 교수인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는 '추석을 즐기는 법'이라는 칼럼이 실려있다. '명절 스트레스' 키워드로 기사도 커뮤니티 글도 도배가 되는 이맘 때, 가끔 꺼내보는 글이다.
*오늘의 밑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어서 교자상에 올리면 가장 좋은 대접으로 여겼다'는 신선로조차도 스스로 해 먹고 싶지는 않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남이 해줄 때만 맛있다. 추석 음식을 마음 편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직접 음식을 하지 않는 가정의 권력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송편 속에 콩을 넣는 만행이 지속되고 있다. 송편을 한입 물었는데 그 속이 꿀이 아니라 콩일 경우 다들 큰 좌절감을 맛보지 않나.
추석을 즐기기 위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 정신에 충실하기로 하자. 누구나 자기 손으로 신선로를 만들어 먹을 권리쯤은 있다. 콩이 싫다면 송편에 어떤 속을 넣을 것인가에 대해 토론하여 트라우마를 치유하자.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송편에 넣을 콩은 누가 준비할 것인가. 신선로는 누구네 집에서 모여 만들어 먹을 것인가. 나의 명절은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