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by 김수혁

“너는 챙겨주는 사람을 만나야 해”


그런가? 요즘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고 다녔는데, 이런 소리를 간혹 듣곤 했다. 어떤 이미지길래 이런 말을 던지는 건지, 어찌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이야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듣고 즉석에서 흘리는 편이긴 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주던지는 “나다운 게 뭔데?”의 파생으로, 던져진 말들이 정성과 진위의 문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것들을 모르고, 조금의 착각 속에서 살게 되며, 아주 조금인 실낱만큼의 진위만을, 전부 통틀어 아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 그러니 내던져진 말이 내 양쪽 귀를 들락날락하는 건, 단순한 구분의 실천이겠지.


그렇지만, 말이 나왔다는 건 나름의 징후가 있다는 논리로도 해석된다. 어떤 외형적 특질이 보여서 그랬던 걸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본 내 모습이 어찌 보였던 걸까. 도대체, 왜, 어떤 부분에서. 한동안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다 예전에 본 어느 영상이 떠올랐다. 연예인들을 상대로 정신과 의사가 상담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관계성의 문제가 꽤 많이 다뤄졌던 것 같다. 어떤 대상을 보며 떠올리던 것, 그를 위해 끝까지 파헤치는 게 인상 깊기도 했다. 특히 부부와 가족의 문제는 대부분 유년 시절 부모님과의 문제, 그의 복제본이라는 것도.


흐름은 자연스레 내 유년의 역사로 흘러갔고, 엄마가 등장했던 장면들을 틀어놓기 시작했다. 너무나 당연히 생각하던 기억과 그제야 새삼스레 떠오른 시야가, 이리저리 뒤섞이며 다른 형태로 보여졌다. 다시 봤지만 새로운 광경에 한참을 보고 있기만 했고, 꽤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되뇌었다. 흔히들 일어나는 일이 내게도 일어났을 수도 있겠다고. 내가 갈구하던 게 그 사건들 속에 뒤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과거를 이렇게 기억한다. 몇 초 내로 잘려진 장면, 내 눈이 카메라를 잡은 채 비추는. 때론 꿈과 현실의 기억이 구분되지 않을 때도 있는데, 시야가 내 중심이냐 아니냐가 큰 단서다. 그렇지만 내 눈이 중심이 된 꿈도 있어 헷갈리는 것도 있다. 특히 반복되며 꾼 꿈은 마치 겪었던 일처럼, 지금까지도 잔영을 남겨놔서 여전히 아리까리하다. 예를 들면, 성장기에 꾼 엘리베이터가 끝없이 내려가는 꿈이 있다. 숫자가 멈추지 않고 바뀌는 게 굉장히 무서웠더랬지. 하지만 꿈과 지각의 단절 또한 생생했기 때문에, 그건 확실히 비현실이라 구분할 수 있다.


개중엔 엄마가 등장하는 장면도 있었다. 한참을 자라야 할 나이쯤의 짧은 기억. 시작은 내가 잠시 걷지 못하지만 앞을 보고 있다. 어린 내 앞으론 보도블록으로 덮인 꽤 높은 언덕이 있고, 엄마는 누나의 손을 잡은 채 언덕 위에서 걸어가고, 저 멀리 사라져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한다. 작은 나도 저 손을 잡고 나란히 가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기만 한다. 그리고 암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꽤 크고 나서도 잘 몰랐다. 현실의 감각이 다른 꿈에 비해 생생하다랄까. 그렇지만 지금은 사실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최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당신 어머니의 교육 방식은 꽤 흥미로웠다는. 할 것을 다 하면 뭘 하든 내버려둔다고. 이를 입증할 기억은 충분하다. 제사용 큰 식탁 앞에 앉아 누나와 함께 문제집 풀이에 몰두하던, 함께 게임을 하다 키보드가 안 먹혀 급히 단자를 뺐다 꽂던, 그런 가열차게 살던 날들은 수두룩했다. 물론 신나게 놀던 장면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더불어 흘러가는 유년의 추억엔, 서점에 들어가거나 나오던 장면들이 꽤 많다. 그 의도는 당신 자식들에게 잘 먹혔다. 사춘기 전에 누나는 오페라의 유령까진 읽었고, 나도 펄벅의 대지까진 흥미롭게 읽었으니.


돌이켜보면, 엄마는 가족들을 온몸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이 충당되어야만 했고, 언젠가부터 엄마의 굽은 등은 잠들기 전의 풍경이 되었다. 동시에 엄마는 집에서 먹는 거의 모든 음식을 당신의 손으로 만들고 있었다. 매 끼니 가족들이 먹을 밥상부터 매년 거실에서 하던 김장까지. 특히 나는 그로 만든 찌개를 좋아했었다. 온 가족이 식탁에서 일어난 후엔, 부엌에서 홀로 설거지하던 뒷모습도 떠오른다. 그래서 그 무렵의 나는 천진난만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것도 걱정할게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엄마가 마냥 이상적인 양육자란 건 아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사랑해” 같은 말을 내게 한 적이 없다. 근대적 모상과는 달리 말로썬 꽤 무뚝뚝한 사람이었달까.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런 엄마와 지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말로써의 표현은 어색한 편인 것 같다. 중요한 건 그 시절의 내겐 감정적 터치가 필요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현실이란 이름의 모든 압제를 부모가 버텨내 주고 있었고, 당신 자식들은 그것들 아래서 평화롭기만 했으니. 당신 아들은 어머니의 이름이란 품 안에 항상 안겨 있었으니. 그 어떤 요구도 필요 없는 안락함 속에 머물기만 하면 되었으니.


모든 양육은 독립을 목표로 해야 한다. 모든 아이는 후에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캐치프레이즈같이 쉬운 말에 비해, 필요한 것들은 너무나 많다. 억압하는 세계-장치를 인지하고 분별할 지성, 불안정한 현실 위에서도 서 있을 감각, 반복될 배반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 당신 아들은 세계의 면면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그를 통해 쉴 새 없는 흔들림에도 제대로 넘어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엄마가 남긴 양육의 결과에 대해 이리 정리할 수 있겠다. 나는 무너지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그 배반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영원할 하늘로써의 안락, 대지와의 간극을 떠받드는 거인. 유년의 나는 환상에 머무르고 있었고, 엄마는 겨우 이상을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악한 우상은 곧 붕괴된다. 어느 날 엄마는 쓰러졌고 금방 죽었다. 끝나지 않을 형벌은 거인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하늘과 땅은 합치되어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갔다. 짊어진 가족의 무게는 산산조각 나버렸고,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세계의 진실이 드러났다. 거인은 쓰러지기 전까지만 책임질 수 있었고, 그 후에 남겨진 건 여전히 살아있던 이상의 주민들뿐이라는. 숨길 수 없는 폐허가 불타고 있었다.


잔해 속에 남겨진 사람들. 세계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놀랍게도. 마치 장례가 끝나면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갈 것인 양. 그리고 가치의 심판관들은 이재민들에게 명한다. “그건 네 책임입니다. 살아 계실 때 잘했어야죠.” 더욱이 흥미로운 건 생존자끼리도 서로를 심판한다. “당신 때문이잖아.” 하며. 그들은 내게 엄마의 죽음을 그리 말했다.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부채감과 외면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단지 내게 단 하나의 사실만이 보였을 뿐이다. 남은 건 향수의 감각뿐이고 돌아갈 곳은 더 이상 없다는 명료함이.


또 다른 기억이 난다. 여느 날처럼 과외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숙제했냐는 잔소리를 해야할 쯤이었다. 근데 엉뚱한 질문이 날아왔고.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근처 댁으로 갔다. 그리고 다른 집 식탁에 마주 앉아 몇몇 질문이 이어졌고, 그에 대해선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게 내 전부이고, 여태껏 말하지 못한 것들이 목에 막혀있는, 풀려고 해도 단단하게 응어리져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렇지만 어떻게라도 다 풀어놓았다면, 눈앞 경청의 대상을 붙잡을 수 있었다면.


그러니 내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감아, 어떻게든 털어놓을 기회를 다시 준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저를 안쓰럽게 쳐다봐요. 엄마가 죽었다면서. 그렇지만 나는 나를 불쌍히 여기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죽음의 피해자라는 전시관에 갇히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엄마가 지켜주고 있던 그 포근한 감각, 그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다시 가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들이 충격받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같이 웃으며 넘기는 걸 바라는 거예요. 어른들은 그것도 모르고 화만 내요. 이게 어른이라면 난 영원히 자라지 않을래요. 나는 무책임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너무 많은 걸 바랬던 건가요? 잃어버린 고향을 되찾는 건 불가능한 건가요? 제발 누구라도 대답 좀 해주세요…



사람은 죽는다. 이 단순한 사실은 평화로운 유년을 지나,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쯤에 덮쳐왔다. 당연하긴 하다. 그 누구도 당면한 진실을 갈무리하지 않았고, 덮어놓은 시체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 정리되지 않은 영혼은 자신을 마주 보는 이를 언제든 목 조를 수 있었으니.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되뇌이곤 했다. “엄마는 죽었다. 죽었다는 건 살아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항아리 속 잿더미다. 이에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현실 부적응자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끝까지 썩은 내를 풍기게 기만해야만 했던 걸까. 현실이란 건 적응이 가능한 걸까.


나름 괜찮은 방법이긴 했다. 그 누구도 견디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없었고, 엄마가 물려준 유산을 적절히 사용한 것뿐이니. 그렇지만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혼자 감당하지 마세요.”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했겠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밀어냈으니.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의 전경은, 차갑게 내리쬐는 푸른 가로등 불빛과 잠들지 못하는 시계의 째깍거림이었으니. 우습게도 그런 말들은 괴리를 더 드러내 준 셈이다. 도달 불가능한 그들만의 천국과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진창, 그 사이를.


최초의 구분은 이렇게 태어났다. 저 찬란히 빛나는 공동체 속의 신성 아래, 나올 수 없는 뼛가루 늪에 내리비치는 후광을 애써 외면하던 와중에. 아름다운 고향을 찬미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 비가역의 열등을 여실히 느끼며. 되돌릴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그러나 정상성의 진리 또한 견뎌내야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러니 유년의 향수는 불타는 질투에 가려져 모습을 감추었고, 한동안은 반동의 감정에 휩싸여 지냈다. 당연한 일이다. 압제 그 한복판에 서서 어찌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까.


그러니 나와 닮은 것들을 찾아야만 했다. 내 현실과 닮은 가상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자기변호 없이도 안락할 수 있는 전경을 보여주는, 그런 살아 있지는 않은 무엇을 향해. 그로써 신성으로의 열등만을 짚어낼 게 아니라, 내 일부를 자극하는 것들을 분별 가능하도록. 물론 그 속엔 희미하게 잔류하던 향수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균형을 잡지 못했던 나는, 이 모든 것을 세계와의 불화라고만 구분했다. 내가 정녕 그리워하던 것들은 세월의 흔적에 풍화되어 있었고, 물려받지 못한 고향의 감각은 의식 아래 잠들어 있기만 했다.




나는 이상형이란 말을 싫어한다. 어찌 자기 자신을 그리 잘 앎과 동시에, 어떤 신성시된 인간상 하나가 존재한다는 건가? 만약 성애가 그에게 제1의 가치라면, 오히려 이상형의 발화는 사랑을 오해로써 더럽히는 건 아닌가? 그러니 “챙겨주는 사람”이란 연인상을 들었을 때도, 마냥 유쾌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모르는 것을 함부로 말한다는 건, 그만큼 오해가 깊어지는 일 아니던가. 하지만, 미지 그 자체로 출발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물어지는 건 앎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모르는 걸 도마에 올려놓고 구분자로 자를 수 있는 기회.


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내가 다가갈 때의 공통점이 있긴 했다. 대면할 때의 어떤 상냥함, 거부되지 않을 확신을 주는 미소, 이들이 반복될 때 느껴지는 무엇.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를 자극하는 행동과 의도들. 배우지 못했던 취약점을 감싸안아 주는 무엇, 내버려지지 않겠다는 나의 암묵적 착각. 몰아치는 세계 속에 안겨 있을 수 있겠다는 잠재적 기대. 전부 이런 동기로 움직였던 듯싶다. 여기에 문득 꼬리표가 하나 더 붙는다. 이게 연애로써 가능한 것일까. 나는 너무나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간혹 모든 결정과 판단들이 일종의 선고로 보일 때가 있다. 어디로도 되돌릴 수 없는 동시에 거짓으로도 비켜나갈 수 있는 잔혹한 선고. 엄마와 이상형. 이제 나는 되돌릴 수 없는 판단을 선포하는 셈이다. 잘못된 구분의 반복 그 가능성을 들어 안은 채. 하지만 나는 다른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누가 이를 미리 알고 있었겠는가? 안다 해도 모든 기대는 깨지는 법이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현기증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묻고 싶다. 왜 아무도 사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지. 살아 있다는 건 어찌 이리도 아찔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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