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읽은 후에

by 김수혁

“시벌 이게 뭔소리여?” <이방인>을 처음 읽고 난 후의 소감이다. 유명하기로 유명한 책이어서 펼쳐봤는데, 짧은 만큼 정말 짧은 감상만 남았기 때문이다. 다른 입소문이 가득한 책들은 읽고 뭐라도 남았는데, 순수히 허탈하기만 한 적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어이없기 짝이 없는 책에 대한 발제와 정리를 해야 하게 되었다. 으악. 두세 번째 다시 봤던 기억이 있지만 붕 뜬 내용만 기억나고 정리는 안 하고 넘어가기만 했었다. 내용은 구체적인데 의도가 안 읽힌다랄까?


이젠 알아야 할 일이 생겼으니, 뭔소린지 파봐야겠다. “몰라요.”라고 대답을 하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모르는데 안다고 하는 건 거짓과 비약 아니던가? 작가는 이에 대해 <이방인> 뒤에 수록된 편지에서 이런 말도 적어놓지 않았던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을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이러니 더더욱 모르는 걸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말은 해야지.


그러니 본문의 내용은 <이방인>의 내용만 다루지 않고, 관련된 알베르 카뮈의 다른 저작과 같이 엮을 예정이다. <이방인> 하나만 읽으면 당최 뭔소린지 잘 모르겠으니, 다른 작품에서 드러난 의도들로 채워보자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만의 해석을 원하는 독자는 여기서 멈춘 다음, 상징이 점철된 이 소설을 먼저 읽는 것을 추천한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저작에는 이런 문장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상징은 항상 일반적인 것 가운데 있으며, 상징에 대한 해석이 아무리 정확하다 할지라도 예술가는 그 속에 전체적인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을 뿐이다. 즉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맞아떨어지게 옮겨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상징적 작품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상징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초월하며 사실상 그가 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이상을 말하게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상징을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자극하지 않고 선입견 없이 작품을 읽어 나가며 그리하여 그 은밀한 흐름을 찾으려 하지 않는 일이다. (시지프 신화, 부록: 프란스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189-190p)


큼. 물론 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자극하는 일이다. 어쩌겠는가. 요약은 그 나름의 비약을 만들어 낸다. 설명이 아닌 묘사로써의 예술을 이야기하는 이의 글을, 설명으로써 대치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조리한 일이다. 읽으라고 열심히 써놨는데! 하지만 <이방인> 하나만으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아니, 많이 많이 무리다. 엔딩이 강렬한 것은 느낄 수 있으나, 그 많은 지면을 할애한 감정과 논리를 읽어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의도와 다른 아이러니를 뒤에 두고, 욕이 절로 나왔던 곳을 파헤쳐볼 필요가 있겠다.


1부 : 육체성


<이방인>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간결하게 정리된 엄마의 부고와 상사 눈치 보기로 시작해, 양로원에서의 밤샘과 미묘한 죄의식의 순간들, 아스팔트조차 녹일 햇볕 아래 영구 마차와의 행진, 곧 다시 돌아온 출근과 일상들, 살라마노 영감과 잃어버린 그의 늙고 병든 개, 사랑하는지 결혼은 할 건지 묻는 마리와 뫼르소의 무심함, 그리고 머리 아픈 바닷가에서의 경험과, 쾅쾅 내리박는 햇볕으로 인한 졸음과 그로 인해 불행으로 향하게 된 다섯 발. 1부는 태양 아래의 죽음과 상실과 살인의 이미지 사이, 끼어있던 일상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2부는 심문으로 시작된다. 살인에 대한 심문인 듯하였으나, 남은 건 믿고 굴종하지 않은 반기독자라는 오명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감옥에서의 자유 없는 생활과 마리와 통하지 않는 면회가 그려진다. 직후의 재판은 살인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장에선 뫼르소를 어머니의 죽음에도 방탕하게 놀아제끼는 인간으로 결론지으며 유죄 선고를 내린다. 그리고 감방 안에서 신부에게 자기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그 시련조차 감내할 것이라 하고 끝끝내 함성을 내지른다. 직후 엄마의 죽음 이전의 자유와, 단두대 앞 함성 속의 해방감을 상상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대강 내용은 이렇다. 내용도 짧고 뒷부분에선 워낙 정신없이 흘러가서, 읽기에 부담은 없었지만 “얘 왜이래?” 하는 생각은 든다. 문장도 짧고 건조하게 치는 방식이라 무뚝뚝한 감정선이 더더욱 강조된다. 많은 소설에서 차용하는 주인공을 통한 이입을 <이방인>에게선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솔직하다 못해 아는 것만 말하려 하는 듯하다. 논리적 감수성이 예민한? 다른 특징으론 강렬하게 내리쬐는 이미지와, 여러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상기다. 엄마의 죽음은 중간마다 계속 등장하며, 마지막은 주인공 뫼르소의 상상 속 처형의 장면으로 끝난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죽음. 알베르 카뮈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소재긴 하다. 코로나 때문에 덩달아 유명해진 소설 <페스트>는 페스트로 인한 떼죽음을 소재로 삼으며, 희곡 <계엄령>은 독재를 위한 무기로써의 죽음을,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은 살인 정당화에 대한 형이상학적/역사적 고찰을, 에세이 <시지프 신화>는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에 대하여, 희곡 <칼리굴라>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짧은 에세이 묶음 집인 <안과겉>, <결혼>, <여름>에서도 죽음에 대한 고찰은 여전하다. 이를 반복해서 써둔 걸 보면, 작가 카뮈에게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된 건, <이방인>의 집필 년 도와 출간 연도 겹치는 <결혼>, 같은 세트로 묶이는 <시지프 신화> 정도다. <결혼>은 직접 카뮈의 의도가 잘 드러나서 편하고, <시지프 신화>는 뫼르소의 마지막 일갈을 이해하기에 적절하다. 자전적 에세이 모음집 <안과겉> 과 <칼리굴라>는 시간이 없어서 못 읽어봤다. 하여튼 두 책만 잘 봐도 <이방인>의 집필 의도를 알기에는 적절할 듯싶다. 우선 <결혼>에서 죽음을 다루는 구절부터 보자.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특히 나는 개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 내 속을 뒤집어놓는 것은 그것을 손으로 만져볼 때이다. 그때 나는 꽃, 미소, 여자에 대한 욕망을 생각해본다. 그러면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사람들, 꽃과 여자에 대한 욕망이 살과 피로 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을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 영원 따위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혼, 제밀라의 바람, 30p)


<이방인>의 환영이 가시지 않는다면,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과 살라마르 영감네 개의 죽음(같은 실종)이 떠오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카뮈는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와 동시에 “삶에 대한 질투”를 되감는다. 내가 죽은 뒤에도 저 좋은 것들(꽃, 미소, 여자)을 차지할 다른 인간들을 상상하니, 질투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를 육체적 감각의 총체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 <이방인> 뒤편의 편지 일부에도 언급된다.


<이방인>은 사실주의도 아니고 환상적 장르도 아닙니다. 나로서는 오히려 육화된 신화. 그것도 삶의 살과 열기 속에 깊이 뿌리내린 신화라고 봅니다. (<이방인>에 대한 편지, 151p)


작 중 내내 뫼르소는 손끝에 감기는 마리의 살갗을 느끼고 그리워하며, 하늘에 닿을 듯한 실편백나무들 혹은 붉은 제라늄 꽃들-풍경에 시선이 간다. “하늘은 파랗고 황금빛이 돌았다. 나는 목덜미 아래서 마리의 배가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죽는다면 누리지 못할 것이다. 감각의 총체들이라 할만한 이것들을, 죽어서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그러니 카뮈에겐 이 느낌을 연장시켜줄 젊음 또한 중요하다.


알제에서 젊고 생기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승리를 위한 피난처요 구실로 여겨진다. 해안, 태양, 바다를 향하여 뻗어가면서 붉은색과 흰색이 놀이를 하고 있는 듯한 집의 테라스들, 꽃, 경기장, 싱싱한 다리를 가진 여인 등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일단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마음 붙일 곳이 전혀 없으며 우수에서 헤어날 수 있는 장소 하나 없다. (결혼, 알제의 여름, 34-35p)


잃어버린 젊음과 예정된 죽음. 카뮈에겐 노인이란 그런 이미지인 듯하다. <이방인>에게선 늙은이에 대한 묘사도 꽤 치밀하다. 1부 1장에서 표현되는 양로원 친구들과 애인의 묘사, 곧 잃어버릴 늙은 개와 살라마노 영감에 대한 첫 묘사들은 꽤 공들인 느낌이 든다. 대표적인 노인의 묘사를 앞세움으로써 죽음에 대한 강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페레스의 얼굴. 흥분과 힘겨움으로 인해 굵은 눈물이 그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주름살 때문에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눈물 줄기들은 퍼졌다가 한데 모였다가 하면서 그 허물어진 얼굴 위에서 니스 칠을 해 놓은 듯 번들거렸다. (이방인, 1-1, 27p)


뫼르소든 카뮈든 중요한 건 육체성이다. 살아 있음으로써 꽃, 미소, 여자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 그리고 육체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니 살덩이의 말로인 죽음 또한 중요하다. <제밀라의 바람>에서도, 자신의 죽음이 야기한 질투를 털어놓지 않았던가. 죽음과 젊음. 여기에 또 하나의 상징이 달라붙는다. 온몸으로 받아내는 태양, 그 육화된 진실의 세계가.


나는 모든 선입견을 물리치고 하나의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리라. 그 진실은 태양의 진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나의 죽음의 진실이다. (결혼, 티파사에서의 결혼, 18p)


그가 말하는 태양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가? 죽음이란, 꽃, 미소, 여자들을 즐길 수 없게 되는 일임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매개체다. 태양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그림자도 없어 피할 수 없는 정오의 태양, 새파랗게 열려있는 하늘 아래에서 느껴지는 관자놀이의 박동. 동시에 반대되는 것으론 바다가 있다. 타버릴 듯한 대지를 뒤에 두고, 흠뻑 감겨오는 소금기 어린 물결. 삶과 죽음의 대비는 태양과 바다로 다시 돌아온다.


통일은 여기서는 태양과 바다라는 항으로 표현된다. 그 통일은 그 나름의 쓴맛과 위대함을 동시에 가진 육체의 맛을 통해서 가슴에 느껴진다. (결혼, 알제의 여름, 47p)


강렬하게 내리박는 햇빛 아래의 장례 행렬, 감옥 속 처형을 예감하는 뫼르소 그리고 스쳐 가는 헤엄 속에서 닿은 여자의 살결, 미소 짓는 얼굴 아래 손에 매달린 바위 붓꽃 몇 송이. 태양과 바다. 운명과 질투. 죽음과 삶. 교차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소설은 어떤 주장이 아닌 묘사로 내용을 채워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주어진 것들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들은 전부 어떤 의도에 의해 배치되었다고, 감히 나는 주장한다. 다만 1부의 내용은 앞선 육체성의 이야기로 설득될 수 있으나, 어떤 2부의 내용은 아직 쉽사리 설명할 수 없다. 특히나 끝부분의 진위는 뭔지 모르겠다. 왜 뫼르소는 그렇게 구원을 권하는 신부에게 화를 냈을까? 엄마가 죽는 건 슬픈 건데 왜 슬퍼할 권리가 없었다고 한 것일까? 왜 단두대 앞에서의 증오의 함성을 굳이 굳이 듣고 싶다고 하는걸까? 이것들이 뭘 의미하는 걸까나. 반 넘게 왔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2부 : 부조리와 엔딩


앞서 언급한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는 <이방인>과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는, 같은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로 꼽힌다. 에세이, 희곡, 소설로써 각각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는 형식이랄까. 이 세 작품을 감싼 주제는, 거부 혹은 부조리라고도 불린다. 이 키워드는 아주 중요하다. 앞서 설명한 육체성은 카뮈의 세계관 속 기본적인 토대라면, 부조리와 거부는 세 작품의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들이 어떻게 나타난단 말인가? 이제부터 알아보자.


카뮈의 작품관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내게 묻는다면, “찬란한 윤슬에 빠져들지 못할 질투 그리고 어디로도 피할 수 없이 내리쬐는 운명”이라 하겠다. 접속사로 묶였으나 두 요소는 서로 충돌한다. 끊임없이 욕망하게 되나, 맞닿은 세계는 그에게 실망만을 안겨준다. 우리는 그것들의 통일을 바라지만, 둘러싼 우주는 여전히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단속적이지만 계속 등장하는 이 모순은 우리에게 어떤 감수성을 쥐여준다.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 주는 세계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매 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77p)


육체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진실, 그건 살아있음 자체가 부조리를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조리의 감수성, 무너져 내릴 언젠가를 향한 맞대면, 지나가 버린 육신의 영광과 다가오는 결말, 그 모든 죽음의 형태를 마주할 특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그러니 살아있음과 마주 봄은 이 작품관 속에서는 같다. 다가오지 않은 죽음은 남김없이 살아갈 이유와도 같다. 앞선 두 대립, 비끄러매 놓였다는 그 모순은 모두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나는 내 명징한 의식을 극한에까지 밀고 나가서 나의 모든 아낌없는 질투와 공포와 더불어 나의 종말을 응시하고 싶다. 내가 세계에서 멀어져감에 따라, 그리고 영원히 지속하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에 집착을 가짐에 따라, 나는 죽음을 더욱 무서워하게 된다. 또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곧 나와 세계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며 영원히 잃어버린 한 세계의 열광적인 이미지들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기쁨도 없이 완성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결혼, 제밀라의 바람, 31p)


삶과 죽음에서 피어난 부조리의 감수성,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명징한 의식. 내게는 낭만 한가득인 이 주제는, 이 유일한 진실을 가로막는 것들에 대한 거부로 연장된다. 무엇에 대한 거부인가? 부조리를 파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거부다. <시지프 신화> 는 이 논증을 위한 에세이이며, 카뮈는 여기에서 부조리를 살려놓기 위한 명확한 거부의 제스쳐를 취한다. 뫼르소의 오엄죽보단 덜 유명하지만, 나름 유명한 첫 문장에서 거부의 대상이 언급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15p)


왜 자살을 거부할까? 살아있다는 것은 언젠가 다가올 사형의 순간을 견디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를 자신의 의지로 끊는다면? 과정은 소멸된다. 육체가 가진 유일한 진실은 작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조리를 살려내는 일은 곧, 계속해서 살아있어야 하는 일이다. “무슨 이유로 인간은 죽어야 한다”라는 모든 명제에 대하여,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완곡하게 거부한다. 그러니 저 명징한 문장을 첫 기수로 내세워, 논증을 열어가는 것일 테다.


그는 같은 이유로, 부조리를 은폐한다는 또 하나의 무엇을 거부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끝으로 이 모순의 본질은 내가 회피라고 부르고자 하는 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회피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이른바 파스칼적 의미에서의 ‘위희’ 이하의 것인 동시에 이상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시론의 제3의 주제인 치명적인 회피는 다름 아닌 희망이다.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 혹은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어 결국은 삶을 배반하는 어떤 거창한 관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 말이다.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22p)


인간은 죽는다. 그러니 인간은 두렵다. 그러니 인간에겐 어떤 희망이 필요하다며, 누군가는 죽은 이후의 삶까지 있다고들 한다. 내세의 존재 증명이 가능한가? 아니다. 증명 그 자체마저 완결성이 없다. 확실한 건 오로지 손끝에서 짓뭉개지는 제라늄 꽃의 붉은 피, 쿵쾅거리는 심장과 아스팔트마저 녹일 듯한 피부 끝의 불타오름, 넘실거리며 온몸을 가로지르는 흐름과 그 속에서 스쳐 가는 살결이다. 중요한 건 이름 모를 신이 내민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곧 죽어버릴 사형수가 벽을 들여다보며 그린 연인의 얼굴이다. 이런 연유로 희망과 구원은, 위로와 여흥을 뜻하는 위희(divertissement)와 삶을 배반하는 속임수로 빗대어진다.


“당신은 그럼 아무 희망도 갖지 않나요? 죽으면 완전히 죽어 없어진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건가요?”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이방인, 2-5, 141p)


<이방인> 2부는 카뮈의 부조리 관점이 아니어도, 충분히 우리가 아는 부조리로 설명이 된다. 그는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되나, 변호사와 예심판사에게서 “뉘우침”에 대한 자질이 없다는 걸 문제 삼는다. 더불어 재판에서는 죽인 아랍인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만 문제 삼는다. 마치 그는 세계의 이방인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재판 기계에게서 소외된다. 겉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단두대형에 적합한 인간이 된다.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이어진 태양의 강렬함 때문에.


2부의 내용은 <이방인> 집필 시기쯤인 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린 어느 인간의 상황, 그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 것 같다. 신 못지않은 파시즘 혹은 스탈린주의에 (겉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쏴 죽이거나 포격에 죽는다. 전체주의의 법정에서 인간의 목숨이란 중요한 게 아니다. 그토록 그리던 연인의 대면에선 전쟁 속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폭음에 가려 닿을 수 없다. 그러니 당장 주어진 건 자살로 곤두박질치는 데카당스 아니면, 곧바로 맛볼 수 없는 희망을 미래로 보류하며 살인을 정당화하는 붉은 혁명뿐이지 않겠는가. 다만 전란 속 시대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카뮈는 보류된 희망에 대해 전하고자 한 것일 테다.


자, 뫼르소에게 신에 대한 믿음은 2부 시작과 끝에서 강요된다. 처음엔 무관심하게 받아들이지만, 마지막에선 폭발해 버려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전후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감옥으로 비치는 태양 빛 아래서, 남김없이 즐기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재판 후에 뫼르소는 자신이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어떻게든 겉돌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란걸 깨닫는다. 곧 일어날 죽음이 야기한 부조리를 응시한다. 사형수로서 그는 생이 건넨 권리를 마음껏 누린다. 영원을 담보로 한 절대자의 구원이 아닌, 언젠가는 끝나버릴 기한부의 자유를.


그러다 신부가 감방에 들어온다. 신의 사도는 희망을 권유한다. 사형수는 거부한다. 영원의 전도사는 하느님의 심판을 주장한다. 부조리의 인간은 그저 인간들의 심판이라며 반박한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는 돌을 보며 신의 얼굴을 떠올린다. 육화된 진실을 깨달은 자는 대신 마리의 얼굴을 떠올린다. 하늘의 숭배자는 말한다. “그래, 그렇게도 이 땅을 사랑하나요?” 이방인은 앎으로써 침묵한다. 그러고 내세 속 자녀들을 그리던 사제는 다시 말한다. “장담하지만, 당신도 다른 삶을 원했던 적이 있어요.” 오직 자신의 운명만을 가진 사내는 답한다. “지금의 이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삶이죠.”


그러곤 뫼르소는 한바탕 한다.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불어오는 육신의 진실을 느끼며. 곧이어 평정을 되찾은 후, 쏟아지는 별들과 함께 이 대지의 냄새들이 그를 반긴다. 동시에 엄마의 죽음을 떠올리며 자신의 자유를 만끽한다. 폭력과 압제로 점철된 세계가 아닌, “정다운 무관심”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마음껏 느끼면서. 얼마 안 되어 맞이할 단두대의 형상과 그를 둘러싼 구경꾼들, 그 부조리의 감각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하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추론, 91p)


마무리


요약해 보자. 1부에선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이라는 어떤 실존적 위기, 이글거리는 태양의 햇볕을 견디는 장면과 마지막 두통과 균형 잡지 못함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 중간엔 뫼르소의 논리적 감수성이 드러나는 말들, 살라마노의 개의 실종에 대한 문제, 마리와의 관계의 무관심함, 바다에서의 소금 맛 나는 수영들이 배치되어 있다. 더불어 계속 엄마의 죽음에 대한 묘사도 중간중간 삽입되어 있는데, 실존적 문제를 태양에 있기 위한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태양과 바다, 죽음과 삶. 이런 대조로.


2부에선 부조리한 재판이 이어진다. 기소된 이유는 살인죄지만, 끝에 다다라르면 살인죄가 아닌 괘씸죄로 바뀐다. 그리고 면회와 감옥 속에서의 생활은 1부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저 밖의 태양만 바라보는 신세. 전쟁 속 인간의 메타포 같기도 한. 그리고 단두대형을 선고받은 후 신성에 대한 거부와 죽음에 대한 받아들임, 그리고 부조리 속 자유에 대한 묘사로 끝난다. 죽음이라는 부조리를 마주하는, 그러나 구원과 희망은 거부하는 모습으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빗겨나갔다. 이미 읽은 독자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그렇지만 뒤죽박죽인 내용을 정리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선 <결혼>, <시지프 신화>와 연결 짓기만 된 듯하니, 반의반쯤의 성공이려나 싶다. 더불어 다뤄야 할 것들이 좀 더 있는데, 글의 흐름으로는 다루지 못했다. 1부 마지막의 살인이 배치된 의도나, 설정된 무관심한 태도의 의도나, 팩트 폭력배 설정의 의도나, 뫼르소가 정말 쌍놈인가에 대한 진위여부 등. 생각보다 팔 게 많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부조리 사상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면, <시지프 신화>를 한번 읽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뫼르소의 철학적 보론이기도 하다고 해서. 또,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도 그 나름의 낭만 때문이기도 해서. 글의 내용이 <이방인>의 설명이 아닌, 사상의 설명인 것도 같은 이유다.


이방인 읽은 후에. 끝.




* 참고 문헌: 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김화영. 책세상(1989),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민음사(2019),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민음사(2016)

** 본문을 애둘러 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고의 최종적 야망이다. 과학 역시 그 역설들의 끝에 이르면 제안하기를 그치고 발을 멈춘 채 제 현상의 항상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묘사한다. (시지프 신화, 부조리한 창조-철학과 소설, 145p)
keyword
작가의 이전글터널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