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사이

by 김수혁

열차는 달린다. 앞둔 검은 장막을 하나하나 찢어가며. 조그만 점등들은 희미하게 스쳐 가기만 하고, 여전히 열차는 선로 위의 칠흑을 헤쳐나간다. 열차는 승객들의 목적지, 그 이외의 길 위에서 하릴없이 바퀴를 굴린다. 아무런 물음 없이 깔려진 철로를 밀어내기만 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중요한 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 반복되는 어둠 속 외로운 경주. 회빛 생기와 녹슨 행로 속에서, 열차는 날카로운 신음을 토해내며 가야 할 곳으로 향한다. 저 멀리 보이는 승강장의 불빛을 한 몸에 받기 위해. 길고 길었던 시커먼 터널 사이를 향해.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오래된 역사와 스크린도어가 커다란 창문 밖을 스쳐 지나가다, 잘 맞춰지지 않은 사람들처럼 열차는 탑승 문 앞에 비스듬히 선다. 열차가 뜀박질을 잠시 멈추려 속도를 줄일 때, 승객들은 문밖의 스쳐 지나간 벽과 기둥들을 관찰한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열차 안에선 오롯이 자신만의 목적지가 중요한 법이니. 몇몇 탑승자들은 다시 손안의 작은 화면으로 눈동자와 고개를 향하고, 몇몇 하차 자들은 점거한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문 앞으로 모여든다. 도착을 알리는 기계 목소리가 열차 안을 울리고, 무표정의 사람들 사이에 끼어 나왔다.


낡아 빠진 역사, 그 음울한 곳을 나오기 위해 바삐 걸어갔다. 노란색 원으로 표기된 출구로 빠져나가기 위해, 목전에 둔 도착지에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 위로 실려 나가는 낯선 이들 사이에서, 도착 예정 시간과 거리를 작은 화면으로 살펴본다. 째깍이는 시곗바늘에 갇힌 어떤 현대인처럼.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은 하나 같이 죽어 있고, 목적지를 향해 머리 위 안내대로 발을 부지런히 놀린다. 어느덧 위로 향하는 계단이 보인다. 메마른 지하를 빠져나가 지상으로 가는 길.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오르막에 첫 발을 내딛는다.


고개를 올린 채 또 다른 모서리를 밟는다. 측면에서 내려 떨어지는 빛샘이 가로막힌 벽에 명암을 가로지르며 기울어진 구분 선을 만든다. 잠시간의 평지에 발을 내딛은 다음, 다시 내딛을 곳과 그 위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경로 위로 쏟아져 내려오는 따스한 눈부심, 물밀듯이 온몸을 스쳐 내려가는 한낮의 빛무리. 거센 빛살 너머의 새파란 공백을 향해, 찰나의 평지에서 계단으로 다시 발을 굴렀다. 또각. 하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진다. 부서지고 깨어진 편린들이 향한 동굴의 입구와, 발걸음 뒤에 있던 출구 쪽으로. 다시 발을 떼고 계단 하나를 아래로 민다. 이 모든 게 네게 향하는 길인지도 모른 채.


우연이라 해야 할까. 몇 점의 구름으로 덧칠된 청명한 하늘 아래, 가죽 블루종을 입고 있었던 너는 앞서가고 있었다. 커다랗게 세워진 목적지 근처로 향하니, 너는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성이는 바람에, 머리카락 끝도 네 쇄골 언저리를 스치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나는 눈알을 잠시 굴려보다, 대충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고 너도 따라왔다. 엘리베이터가 곧 도착하고, 뒤따른 커플의 뒤에 너와 나는 나란히 섰다. 문 앞에 비춰진 모습을 보니, 내 가슴 어깨와 목 언저리의 높이에 너의 눈이 닿을 듯했다. 조금은 당황스럽고 조금은 쑥스러운, 가만히 올라가지는 양철 바닥에 서서. 그리고 너는 이 일이 재미있었다며, 나를 향한 첫인상을 말했다.


정면으로 마주치는 시선, 작지만 웃음을 머금은 환한 미소. 말하면서도 생기를 잃지 않은 네 표정들. 얼굴을 감싼 차분한 진갈색의 머리카락. 겉옷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작은 체구의 둥근 어깨. 이 어느 휴일의 포근함이 연상되는 이미지가, 너를 향한 첫인상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로 둘러싸여진, 불안과 설레임이 뒤섞인 테이블에서, 유일하게 마주 봐도 안정감이 느껴지던. 어쩌면 대각선으로 마주 앉은 네 뒤편의,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뚫려있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비현실적인 파스텔톤의 배경 안에서 밀려가는 푸근한 솜뭉치들 탓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랬을까. 자꾸만 눈을 마주치고 싶어지고, 그 수줍은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던 게.


길거리를 걷다 문득 말을 꺼냈다. 무심히 지나치는 저 하늘 아래를 걷다, 고개를 들어보면 수많은 구름의 모양들이 보인다고. 그 나름의 아름다움과 함께하는 게 참 즐겁다고. 나는 네 환한 모습에 동참하고 싶었고, 짧은 순간에 떠오른 일상의 즐거움을 다시 떠올렸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겨우 찾아냈던, 내 삶의 아주 작은 일부를 꺼내야만 했으니. 그리고 철없이 말하는 내 모습에 너는 다시 환하게 화답했고, 찰나의 순간을 담기 위해 작은 카메라를 두 손으로 들었다. 네 뒷모습 위로 보이는 손바닥만 한 화면에는, 우리 앞에 있던 커다란 기와지붕과 내가 건넨 시야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의 이미지를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푸근한 미소와 함께한 뭉게구름.


자연스레 흘러갔다.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너와 나는, 전기 신호 속의 관계망으로 이어졌다. 각자의 주머니 속에서 떠다니는 활자는, 그다음 목적지를 향해 치달았다. 잠시나마 경유할 수 있는 정거장이 내게 주어졌고, 나는 그곳을 향해야만 했으니. 그런 내게 너는 말했다. 세계관을 공유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네가 말한 책, 현학적이지만 삶의 부조리를 말하는 머리 아픈 텍스트를, 네 중요한 일부를 읽어내야만 했고 읽었다. 네가 보여준 것에 다시 한번 가 닿기 위하여. 꿈 같이 지나간 네 싱그러움. 그러니 끝나지 않는 갈증을 채우려 네게 또다시 닿아야만 했다. 그땐 알지 못했다. 영원히 닿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순간은 깜빡, 하고 지나간다는 것을.




희뿌연 초록빛 둔덕 아래로 저물어진 땅거미, 반복되며 다가오는 반쯤 노란 옷을 벗은 은행나무와 둘러싸인 어둠을 몰아내는 가로등, 보도 안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기만 하는 비어 있는 사람들. 그 사이로 누군가를 데려가기 위해, 버스는 먹먹하고 뭉근하게 질러오는 비명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목적지를 고대하며 어디선가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난쟁이 승용차들 사이에서 섰다 멈췄다 하며 안간힘을 쓴다.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건, 살아있지 않은 것들. 그 속에서 아스팔트와 벌어진 보도를 밟아가며, 지나가는 회빛 얼굴들과 같이 걸어간다. 표정 없는 그들 속에서 동화가 된 채, 덩그러니 놓여진 정류장을 에둘러 지나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가야만 했던.


나는 기억한다. 그 칠흑과 적막 한가운데에서, 피어나오던 것을. 지금의 습관은 그때와 같았다. 가까운 곳이 아닌 조금 더 가야만 도착하는 정류장에서, 경유지로 향하는 커다란 버스를 타던 습관은. 곧이어 걸어 나온 방향에서 다가오는, 어둠 속을 눈부신 두 눈으로 밝혀오는 살아 있는 것. 그것은 정류장 앞에 멈춰 몸을 열고, 나는 안쪽을 향하는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 좁은 무기체의 내장 안에 올라서자 보이는 것은, 웅크린 채 속을 가득 채운 전원이 꺼져 있는 유기체들. 나는 그들 가운데 매달려 선 채, 창문 밖을 너머를 보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시야에 들어온 네 무너지고 있는 어깨와 모두와 같이 침잠하는 얼굴. 우연과 얼어붙은 세계와의 조우. 그러니 나는 두드려야만 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주저앉기 전의 어깨에 닿은 내 손가락, 닿자마자 깨어지고 부서지는 네 표정 속 균열. 그 사이로 빗발치는 눈부신 광선들과 다시 껴맞춰지는 파편들, 메마른 얼굴들 가운데 순식간에 자라난 꽃봉오리. 한껏 들뜬 내 목소리와 부드럽게 깔리며 두 갈래로 갈라지는 네 목소리, 너와 나 사이로 교차되며 휘감기는 환대의 단어들. 오고가는 말들 속에서 피어나는 네 웃음과 그로부터 부드럽게 감겨오는 섬광. 곧이어 끝에 도착한 어느 평일 저녁 속의 환희. 내린 후에도 가라앉지 않아 되새김질을 계속했고, 그 후로도 나는 작은 우연들을 연이어 만들었다. 곧 쏟아질 것 같은 무채색의 도시 속에서, 살아 있는 것에 닿아 있고 싶었어서.


전까지만 해도, 내게 펼쳐진 건 칠흑밖에 없었다. 여전히 젊은 날의 빈곤한 정서에 묶여져 있었고, 막 마주한 일터의 문제들은 해결할 수도 그 정체를 알 수도 없었어서. 더불어 직면한 세상의 온갖 가치와 등을 돌리고 있었고, 그로부터 찾아오는 분리 감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가야 할 곳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저 떠돌기만 하던 날들. 그러니 마주하는 모든 전경은 생기를 잃어버리려 했고, 나는 그것을 잡아두려 하지도 않았다. 흘러가는 건 여전히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여겼고, 모든 색이 빠져나간 감상은 허무와 이름 모를 갈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연이어 찾아오는 구토와 현기증. 그러니 쫓아야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너를 처음 만난 그때, 난 한참을 배회하고 있었다. 붕 떠 있다는 현기증을 해결하기 위해, 어딘가의 소속감으로 잡아두고 싶었던 때. 그래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잠시 머물 곳에 네가 위치해 있었다. 처음 본 너는 성애의 대상으로써 눈에 띄는 사람이었고, 함께할 기회를 하나씩 만드려 했다. 하나둘 쌓여가는 추억, 우연함을 가장한 귀갓길, 그 후로 함께 놀고 걸어가는 짧은 시간의 반복.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네 인상과는 달리, 너는 언젠가부터 쉽게 내게 다가왔고, 그동안은 온전히 기뻐하기만 할 수 있었다. 무너지던 세계 속에서 다가오던 네 온기. 사라져 흩어질 상황 속에서 나를 붙잡아주던 손길. 아무 사이도 아닌 네게 나는 너무 많은 걸 기대고 있었다.


불안과 부조화의 문제. 그 후의 기억은 모두 두 가지의 문제였다. 처음은 단순히 엇갈리는 만남과 질투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몸집을 점점 불려서, 아무 사이도 아닌 이에게, 마치 불안정한 연인에게서나 느낄법한, 형용할 수 없는 괴물로써 다가왔다. 그러니 잡혀 있던 손을 뿌리쳐야 했고, 그로부터 다시 구토와 현기증의 세계로, 회색 낯빛이 전부인 전경 속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또다시 연결되려는 시도조차 무시하면서. 잔인하다고 여기던 사람들의 행동을, 가까워진 이에게 다시 되갚음으로써. 벗어나고 싶었던 무의미의 체계 속으로, 거부하던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면서.


헤어지던 길의 마지막, 역사 지하와 정류장 서로 다른 두 방향으로 갈라지던 길. 걸어가던 나는 언제나 그랬듯, 다시 지하철 출입구를 향해 발을 돌린다. 수많이 탈각되어 되바라진 나날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과 같이 죽어버린 나의 얼굴. 설레이던 그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두 발을 올린다. 끝없이 내려가는 아찔함, 매번 다시 느껴지는 지상과 지하간의 간극. 통각은 여전히 무뎌지지 않은 채, 어지러이 흔드는 위험 신호를 보낸다. 꿈 같은 나날들이 다시 찾아온다면, 저 너머로 굴러떨어지는 것도 당연하겠지.


열차는 달린다. 그 누구도 함께하지 않은 채,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를 뒤로 한 채. 여태 지나온 사람들의 목적지를 다시 잊어버린 채. 누군가는 도착한 곳에서 내리고, 누군가는 출발할 곳에서 탑승한다. 그리고 다시 열차는 출발한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으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만약 열차의 눈이 앞에 달려 있다면, 승강장의 불빛은 아주 잠시뿐이고 대부분은 터널의 칠흑뿐이겠지. 그러니까, 열차는 이런 이유로 달리는 것이다. 그저 잠시뿐일 깜빡, 깜빡하는 불빛을 위해.

작가의 이전글편집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