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by 김수혁

요즘 참 정신이 없다. 회사놈들이 자꾸만 괴롭히기 때문. 터널을 지나고 있다는 말은 여전하고, 조직 내 사람들은 바쁘게 돌아간다. 나 또한 열불나는 톱니바퀴 중 하나로, 이래저래 맞물려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다. 식힐 틈 없이 열심히 구른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던 걸 계속 하는 것 보단, 나름의 흥미도 있고 머리도 덜 아파서 편하긴 하다. 생각할 틈이 없어 골머리 썩을 일이 없다랄까. 전에는 한걸음 뗼 때마다 신중을 기해야 했다면, 지금은 앞만보고 겅중겅중 뜀뛰는 편이라 그렇다.


그러니 회사 밖은 다른 세상이다. 여태는 내용만 달라진 고민을 집까지 들고 왔다면, 지금은 밖으로 나오며 달궈진 머리가 식혀지는 편이라. 몇일 째 수리 중인 회전문 옆을 지나 나오면, 저 위를 받치는 두 높은 사각기둥 사이로 지지 않은 하늘이 펼쳐진다. 어느 날은 시퍼렇게 뭉그러져 뿌연 주황빛이, 어느 날은 어둠침침하고 차갑게 내리는 빗방울이,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던 말과 상념들을 쓸어간다. 동시에 자기들이 치워놓은 자리에 눌러 앉기도 하고.


요사이 길어진 낮 때문에 쉬러가지 못한 햇님이 눈에 띈다. 선명하게 자신을 내비치던, 그럼에도 곧 사라질 근 미래를 예고하던 모습. 저 멀리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 길고 긴 길을 삼키려는 산등성이의 초입, 그 초록괴물 위로 서서히 내려가는 석양 속의 작은 원. 혹은 녹음 사이사이로 번져, 가까이에선 나뭇잎 사이사이로 부서진 노을 조각들에, 멀리론 저 언덕 너머로 어스름히 흩어지는 이별의 순간들에, 앞만 향하던 고개를 돌려야 했지.


트인 저 너머로 시선을 자주 빼앗길 때면, 거대한 빌딩 무리에서 빠져 나오곤 한다. 유리 거인 사이를 k가로지르는 투명한 강물, 그 옆자리로 향하는 샛길을 따라. 모두에게 감겨온 산뜻한 온기 덕분인지, 느즈막히 발을 놀리는 보행자들과 재빠르게 돌려지는 두 바퀴들이 강변을 채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움찔 거리고, 길을 가로막는 벌레떼에 홰를 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향하게 된다.


속을 내비치는 강물 위로 가라 앉던 황혼의 편린들, 일렁이는 표면 위로 비스듬히 녹아든 별의 파편들. 잠시 뒤를 돌아보면 펼쳐지는 것들에, 입을 벌린 채 있기도 한다. 혹은 다리 아래의 옅은 어둠을 밀고 지나가, 그 아무도 없어 깊게 하늘을 감싸안은 푸르름에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혹은 저 멀리로 보이는 거인 무리들 각각이 옅은 봉선화 빛으로 반쯤 물들어 있는, 곧 눈먼 등대가 되어 사람들을 머금을 것들을 바라보며.


머리 위로 한참을 가리는 회빛 방벽, 그 가로막힌 시야 속 인파에 섞여들어간다. 안전이 제일이라 쓰인 자리에 위치하던, 드넓게 퍼지는 포근한 박명과 파란 어두움을 그리며. 거대한 무리를 따라 서로를 가로지르다, 횡단과 교차 한복판에서 잠시 뒤를 돌아본다. 가려진 지난 날들의 기억 혹은 그를 향한 향수 덕분일까. 아쉬움을 남겨놓은 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로, 태양 빛이 닿지 않는 지하 속으로 흘러 내려간다.




바스락거리며 휘날리는 옷자락, 그 사이로 몸을 스쳐나가는 산들 바람. 고요히 푸-하를 외친 뒤 나오면 반겨주는 여느 저녁의 차분함. 아주 잠깐의 해방을 누린 후 갈 길을 고민한다. 다음 목적지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류장. 그 앞에서 사람들을 넙죽넙죽 삼키는 만원 버스. 괜시리 출근길의 유난스러움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잠깐의 해방감을 조금 더 즐기기 위해, 보도와 보도 사이로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완연한 칠흑으로부터 짙게 나마 지켜낸 창공, 그 사이 사이 희미하게 번지는 한낮의 잔영. 신호를 기다리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광경을, 가라앉으며 흩어지는 장막을 바라만 본다. 그 아래의 땅콩만한 건물이 눈에 들어올 때면, 옆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붕어빵 냄새가, 혹은 떼거지로 몰려다니던 학생들의 떠들썩한 말들이, 하나 둘 기다리던 행인을 스쳐 지나간다. 곧 붉은 점등이 초록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반대편의 보행자들을 향해 아스팔트 도로를 밟아간다.


빌딩 숲을 헤집으며 나아가다 보면, 길을 가로 막는 이들에 눈을 빼앗기곤 한다. 행인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으면서 너그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동그랗게 말아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는 뚱냥이. 혹은 계단 한가운데에 앉아 눈 감은 채 가로등 일광욕을 즐기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길가의 조그만 깡패. 뻔뻔함에 감탄한건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떠들썩하게 만져대는 학생들, 그 옆에 말 없이 서서 피식거릴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 무리를 빠져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달려 나부끼는 잎새들이 보인다. 최선을 다해 발을 놀려 앞서가던 행인들은 사라져 있고, 사부작사부작 발을 툭툭 던지는 이들이 뒤로 지나간다. 혹은 줄을 잡고 목적지 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그 앞에서 바닥에 코를 대고 움찔움찔 킁킁거리는. 혹은 하얀 털로 뒤덮인 짧똥한 네 다리로 발발 거리는, 앞만 보고 돌진하는 탓에 줄에 매달린 사람의 곤혹이 소리로도 들려오는. 그런 광경들이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지나간다.


그 중에서도 해맑게 뛰노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때론 꺄르륵거리며 뒤뚱뒤뚱 뛰어가기도 하고, 때론 두 어른의 손에 매달려 공중에서 한참을 걷기도 하고, 때론 비눗방울 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걸 자랑하려는, 포동포동하게 순진한 표정을 자꾸만 훔쳐보게 된다랄까. 혹은 조그만 킥보드를 겨우 밀어내는 작은 발길질에, 다 같이 회전 그네에 앉아 밀려진 힘에 감탄하는 괴성에, 잠시 마주친 눈빛에 슬며시 웃어주는 쪼끄만 표정에, 자꾸만 미소가 지어져서 그런걸까.


곧 찾아올 따스함에 분수대 위로 솟구치는 물결. 한가로이 휘적이는 이들의 가벼워진 옷차림. 또 다시 다가온 살갗을 내어줄 날들을 여실히 체감하며, 정돈된 수목과 수풀 사이를 구불구불하게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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