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끊임없이 말을 한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가리키는 한계는 무시되며, 화자는 확고부동한 진리를 지니고 있다 가정되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맥락은 끝이지 않는다. 더불어 “나”는 완벽하게 설명 가능한 것 처럼 취급된다. 개개인은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니지만, 모두 말해지는 공산품으로 대체되어 만족스럽다. 그 어디에도 이상하고 의심할 만한 것은 없고, 맞이한 세계는 완벽한 논리로써 빛난다. *
ㅤ행복해야만 한다. 작금을 살아가는 이들은 수도 없이 들었을 말이다. 때론 원자적 개인이 지켜야 할 격언의 형태로, 때론 사랑하는 사람의 달콤한 단어들로, 때론 안온한 세계관을 지키기 위한 발화로써. 시대의 왕좌에 굳건히 앉아 있는 황금률, 그 권력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진리로써 추앙받는다. 그를 의심하는 건 시대를 척지는 행위이며 가까이에 있는 신자들을 배반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무해하기 위해선 행복해야만 한다. 군체는 반드시 한마음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ㅤ당연한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언제나 상처 입고 싶지 않아 하니,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행위는 명백한 유죄다. 모든 인간에겐 항상 안전한 정서의 인큐베이터가 보장되어야 하며, 그 권리의 보장은 말해져야만 한다. 당면한 권익 추구로 인해 그늘로 쫓겨날 이들은 고려될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이 안전하고 행복해야 할 가치를 추구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당위만 적절하다면 어떠한 행위든 자폐여도 상관없다. 나의 선택은 그 무엇과 비교되든 간에 반드시 존중받아야 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ㅤ“나”는 완전한 말하기를 하는 주체로써, 사법적 판단은 그에 걸맞은 행위다. “법대로 하라”는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네 탓이오”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며, 이를 지키지 않는 인간은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더불어 인간은 절대 바뀌지 않으므로, 죄의 낙인을 찍는 건 합당한 처사다. 가슴 깊이 끓어오른 원한은 반드시 보상되어야 하며, 징벌적 행위를 통한 해소는 누가 뭐래도 적절하다. 네가 무릎을 꿇고 칼을 찬 채 내가 저 높은 권좌에 앉아 죄인을 심판하는 건 당연하다.
ㅤ감히 너는 진리에 딴지를 걸 수 없다. 내 말은 언제나 지고지순하며, 네가 말하는 이견은 더러운 공갈이다. 나의 순수에 저항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다양한 형태의 가치관이니 뭐니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하나의 빛나는 진리가 어떻게 여러 개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너는 내가 생각하는 인간적 임의 기준에 반드시 따라야 하며, 단죄를 통해 스스로를 자학하며 반성해야 한다. 고로 너는 무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나의 투명한 진리를 따라야 한다. 내 명료한 말들을 복명복창해야만 한다.
ㅤ…
ㅤ나는 한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동시에 그러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표백되지 않은 환멸과 원한은 여전했고, 여태 반복된 자기방어로 또다시 밀어냈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양심의 가책을 심게 하고, 그 스스로에게 자학을 재현하게 하는 방식. 가학으로 돌아가는 전통의 재림으로. 그것은 “너의 잘못”이라는 주장을 하는 방식으로. 말의 불완전성을 말하여 꺼냄으로써, 침묵을 강제하게 하는 방식으로.
ㅤ말한다는 건 뭘까. 진리를 따르는 건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무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진리를 거부하고 비판하게 된다면, 그 방식은 또다시 같은 죄를 낳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안 하게 된다면, 발화자와 침묵하는 자 모두 죄를 뒤집어쓰게 되겠지.
ㅤ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무엇이라 주장해야 할까. 이 끊을 수 없는 원죄의 굴레는 어떻게 멈출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ㅤㅤ... 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고 설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분명 용서받을 것이다. **
ㅤ요즘 책 읽기가 유행인 듯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굿즈가 유행인 듯하지만, 겉만 보고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러다 열심히 보게 될지도 모르고, 말미암아 현명한 사람이 하나 더 늘면 참 뿌듯한 거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뭐라 말해줄 사람이 하나둘 생긴다는 건 참 기쁜 일이지 않던가. 누군가의 말로 쓰여진 글자들 속에서 직접 헤매며 고민하는,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말이지.
ㅤ뒤돌아보면, 나는 책 읽기를 구도(求道)의 과정으로 여겼던 듯싶다. 어쩌면 납작해졌을지 모르는 활자들 사이에서, 쓰여진 것들을 다시 따라 하며 말하던. 속으로 말하기를 거듭할수록 선명해지던 불투명한 응답들, 그 희미한 신호를 쫓기 위해 끝나지 않고 어디로도 가야 할지 모르는 독해를 반복하던. “답을 찾기 위해”라는 말은 명확한 응답이 오는 조건은 아니지만, 이에 덧붙일 수사-레토릭 정도라 말할 수는 있지 않을까.
ㅤ그런 면에서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Giving an Account of Oneself)를 두 번 통과하는 일은 겪어보지 못한 특이한 경험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러 세계관들이 난무하는 철학책의 인용에 혼란스러웠었고, 하나의 양태 전반을 표현하기 위한 복잡한 문장구조 때문에 잘 읽히지도 않았고, 거기에 원어가 의미한 문장의 의미까지 닿지 않았던, 고되었던 첫 번째 독해는 여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ㅤ무난하고 평이한 제목과는 다르게, 책에선 말하기의 윤리에 관해서 논한다. 특히 윤리적 원자가(valence)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이는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물인 개인을 원자로 두고, 각각이 어떻게 서로에게 접속되며 관계되는지,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어떠한 결합 구조 속에 있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외롭고 분리된 개인주의에 기반한 세계관을, 말이라는 공유 전자를 바늘 삼아 꿰어내기 위해, 저자는 잊을 만하면 구조를 뜻하는 단어를 되풀이한다.
ㅤ이러한 구조를 가리키는 장면, 누군가에 말이 걸리고 말을 하게될 위치에 놓이는 2자적 관계, 어떤 대화의 순간은 원자가의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말 걸기의 장면은 능동적인 발화가 아닌, 누군가에게 말이 걸리는 피동의 조건으로써 출발점을 찍는다. 아무도 여태 의심하지 않았던 “나는 말을 한다”라는 문장은, “너로부터 말이 걸린다”라는 문장으로 바뀌어 표현된다. 나는 나의 자유의지대로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어디에선가 말이 걸려 호출되는 조건, 그로부터 발화는 시작된다.
ㅤ네가 말을 검으로써 주어진 기회, 그로부터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기회를 얻는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위한 수사-레토릭을 반복하고, 끊임없이 어디선가 주어진 나의 일부를 내뱉는다. 하지만 네게로 닿아 다시 돌아오는 말은, 너와 나 사이를 떠다니는 파편들일 뿐이다. 나는 완전히 설명되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 그것들은 그저 언젠가부터 너와 나 사이에 있었고, 단지 공유하는 일부가 되돌아온 것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는 이러한 완전한 대화의 불가능성, 너와 나 사이의 한계 혹은 수수께끼를 통해 서막을 연다.
ㅤ우리는 말을 할 때, 아니 말이 걸려진 기회로 발화를 시작할 때, 폐제(閉除, foreclose)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될 때가 있다. 눈앞의 네가 다르다는 것을 잊은 채, 가정된 자기 자신만이 정답이고 네 말은 공갈이라며, 흥분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말하게 될 때가 있다. 스스로에 휩싸여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하게 될 때가 있다. 나의 말은 때때로 네게 악인의 서사를 뒤집어씌운다. 나의 말은 때때로 열리지 않는 철창이 되어 너를 옥죄이곤 한다. 나의 말은 때때로 너의 모든 잠재태를 잘라내어 가로막는다. 나의 말은 때때로 말 걸기의 장면을 깨트린다.
ㅤ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대화를 종료시키지 않을 방법 하나를 제시한다. 보듬어 안아지고 품에 안겨서야만 가능한, 그래야만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수사를 덧붙이면서. 가능한 일례를 정신분석적 전이(transference)와 역-전이(counter-transference)가 차례를 이루는 장면 속에서 이끌어 낸다.
ㅤ다시 두 사람 간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두 출연자는 분석가와 분석 대상자로 바뀐다. 대상자는 분석가의 상황 속 말 걸기에 처해진다.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혹은 조각들을, 자신이 속한 진리의 언어로 설명하게 될 것이다. 돌아가던 직접적이던 자신의 입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걷지 못하던 유아가 휘청이며 한발 한발을 내딛듯, 말해지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더듬으며 나아가게 될 것이다. 대상자는 분석가에게 말함으로써, 떠도는 한가운데에 처해진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이러한 전이의 과정을 가정한 후, 저자는 분석가가 어디를 가리킬지 논한다.
ㅤ저자는 자신이 설명하려 한 장면, 그로 갈 수 없는 반례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대상자의 불투명한 말들을 일관성의 관점에서만 찢고 짜맞추는 응답에 관하여, 누군가의 삶을 설명하기만 하는 나레이션은 끝까지 닿을 수 없음에 관하여. 나는 너를 위해 완벽하게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너의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잘라내야 한다. 버려진 것들은 보이지 않고 너는 어딘가가 탈구되고 찣겨져 있다. 너는 나의 말로 흠잡을 데 없이 설명되었지만, 설명된 너는 어딘가 투박하게 봉합되어 있고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완벽하게 말해졌으므로 대화는 부서져 내린다.
ㅤ저자는 서사화의 한계를 짚은 다음, 역-전이를 소개한다. 분석가는 분석 대상자와의 대화에 처해짐으로써, 대상자의 세계로 파고들어 헤메이고 떠돌게 된다. 대상자가 더듬으며 찾아낸 힌트들로, 정복 불가능한 미궁 속에서 고군분투하게 된다.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는 스핑크스 앞에서, 분석가는 수수께끼 속으로 길을 잃는다. 어쩌면 자기 자신 마저도 상실하게 되는, 분석가의 끝이 보이지 않는 모험은,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 속으로 치닫게 된다. 그 과정 앞에 있는 대상자는, 분석가에게 말이 아닌 다른 형식의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ㅤ너는 내게 설명하고, 나는 네게 응답한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불투명한 무언가 때문에, 이 말 걸기의 장면은 끝이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일관적이고 완전한 서사로 바꿔칠 수 없는 너와 나의 설명 때문에, 끊임없이 바뀌는 이 역할놀이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ㅤ저자는 이러한 끝이지 않는 수사로써의 결합, 윤리적 원자가의 지속 가능성을 전이와 역-전이의 맥락을 통해 말한다. 하지만 독자는 한계와 수수께끼, 불투명성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대화 안에서의 실천만 주어졌지, 상황의 설명은 아직도 전제되어 있기만 하다. 왜 말은 하는 게 아니라 걸어지는 걸까. 왜 너와 나 사이는 불투명성이 가로막고 있는 걸까. 어쩌면 항상 상황이 먼저이고 풀이는 뒤에 등장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불투명성의 실마리가 있던 것은 아닐까.
ㅤ누군가는 인간을 설명할 때, 과학의 분과-생물학이 발견한 공로를 가져와 들이민다. 너와 나는 이로써 완전히 설명 가능하고 이로써 더 이상 의심할 여지는 없다고. 종족 보존의 욕구와 이기심은 인간 종의 각인된 “본능”이니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며. 정말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설명은 가능한가? 우리 관계 사이의 공백은 단일-진리로의 추앙을 위해 무시되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끊임없이 자라나는 원한과 자책은 도대체 어찌할 것인가?
ㅤ저자는 이러한 고민, 닫힌 자아만의 한계를 미리 고민하기라도 했다는 듯, 또 다른 가설적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단순히 나 자신을 위한 “본능”이 아닌, 삶의 시작부터 숨어든 누군가의 수수께끼로부터. 무력한 영유아에게 숨어든 양육자의 이질성(foreignness, étrangeté), 그에 포위당해 압도당하는 경험으로부터. 외부에서 침범한 어느 이질적임 때문에,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탄생한 인간의 인과를 안이 아닌 바깥으로 열어놓고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제시한다.
ㅤ반복해 보자. 영아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밀려 나온다. 탄생되어진 아이의 탯줄은 끊어지고 아물면서, 양육자에게 둘러싸여 보살펴지고 먹여진다. 아기는 성인 세계로부터 완전히 압도당해지며, 성장이라 불리는 것은 침해와 침범으로 구성된다. 아이는 무력하고 제한 없는 수용의 환경에서, 양육자의 알 수 없는 수수께끼 적 신호(기표, enigmatic signifier)를 각인시킨다. 이질적인 것으로 구성되는 무의식은, 자신을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게 만든다. “나”를 이루는 무언가는 밖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로써 자기 자신은 불투명하게 설명될 수밖에 없다.
ㅤ저자는 장 라플랑슈가 고안한 세계관, 프로이트에서 시작해 라캉을 지나온 정신분석학에 기반한 세계관을 대안 중 하나로 제시한다. 외롭고 고독한 자아가 아닌, 앞선 누군가로 인해 꿰어진 “나”. 한참을 자라고 나서야 과거의 일부를 설명하는, 탄생 직후의 사후성(nachträglichkeit)에 뒤쫓기는 “나”. 자기 자신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선, 자신의 양육자, 그 양육자의 또 다른 양육자, …, 그 끝나지 않을 추적을 수행해야 하는 “나”. 어쩌면 “나”라는 말은 너무나 많은 연결을 끊어버렸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라는 말은 이미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던 걸지도 모른다.
ㅤ이렇게 서로가 얼기설기 엮여 있는 관계, 말 걸기의 장면 속에서 공유되는 관계, 너와 나의 대화가 끊이지 않아야 하는 관계는, 또 다른 책임을 구성할 수 있는 구조와 기회를 제공한다. “나”의 전지전능함에 기초하지 않은, 도덕적 나르시시즘에 갇혀 있지 않은, 자기방어의 논리로 “너”를 해치지 않을, 너와 내가 지닌 취약성을 지닐 수 있는 책임을 구성할 기회. 저자는 윤리적 원자가, 그 결합한 관계-구조 속에서 책임감의 가능성을 논한다.
ㅤ그러나, 누군가는 무책임하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유일한 “나”의 세계관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통용되는 양심이란 수갑을 채울 수 없다고. 분명한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지만, 원죄를 되풀이하는 심판의 책임이 가능하다고. 도덕적 원한으로부터 밀려온 “나”는, “너”를 비난하여 외면해야만 하는, 가학과 피학이 영원히 반복될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고. 손을 더럽히는 걸 주저하는 “나”는, 당면해야 할 폭력을 책임지지 않는다고. 작열하는 현실에 눈감는 “나”를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고.
ㅤ그리고 저자는 후반부에서 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진리 구조 내의 비판적 말하기를 꺼낸다. 그로써 끊이지 않는 말 걸기의 장면 안에서의, 너와 내가 끊임없이 접속되어지는, 폐제를 거부할 수 있을 피동의 책임감을 놓지 않는다.
ㅤ우리는 가끔 합리적이라 말한다. 어떤 것들은 납득 가능하다고 하며, 어떤 것들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합리성은 대화 속에서 꾸준히 호출되지만, 그의 출처와 장면 안의 상관관계는 거의 가정되어 있기만 하다. 너는 내게 합리성 안에서 말을 건다. 그리고 나는 네게 다시 그 진리 안에서 말을 건다. 그렇다면 이 구조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걸까? 이의 형태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불투명성의 또 다른 이면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합리적임은 어떻게 말해져야 하는 것일까?
ㅤ저자는 합리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 아도르노와 후기 푸코의 텍스트를 가져다 쓴다. 그중 하나는 합리성의 공갈(chantage)스럽고 악당(Schurke)스런 면모랄까.
ㅤ우리는 살면서 도덕적 순수와 도덕적 나르시시즘 사이에 끼어 있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나의 도덕률은 언제나 진리이고, 나와 다른 도덕률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라는. 또 다른 누군가는 그 말의 한계를 알면서도 또다시 반복한다. 너의 도덕률은 자폐로써 문제점을 지니고, 나의 도덕률은 그러지 않으니 맞다면서. 전자는 아도르노가 언급한 칸트 적 순수의 문제점을 지적한 깡패, 후자는 자신과 다른 합리성을 배제해 버리는 공갈적 면모이다.
ㅤ하지만 이 둘을 언급하는 과정은, 또 다른 악당을 되어버리고 또 다시 공갈을 치는 것 일수도 있다. 자기 주장만 하는 꼰대를 비판하는 누군가는, 합리성의 이면인 또 다른 꼰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 일수도 있다. 자기 자신만이 옳다고, 나는 절대 틀릴 수 없는 절대 진리라고, 그대로 굳어버리는 건 또 다른 악이 되어버리는 것 일수도 있다. 무너져내리는 현실 앞에서 실행한 자유와 반항은, 누군가에게 또 다시 부셔져야만 하는 것 일수도 있다. 너와 나의 대화는 또 다시 차갑게 굳어버리고, 산산 조각나며 흩어져버리길 반복한다.
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내게 말을 걸어올 때, 그리고 내가 다시 네게 말을 걸 때, 말 걸기의 조건인 합리성에 대해서는 전혀 저항할 수 없는 걸까? 책임감은 적어도 위악을 뒤집어써야지만 실현 가능한 것일까? 역사는 되풀이되었으므로 또다시 벌어져야만 하는 걸까? 각자의 오류가능성(Fehlbarkeit)에 기반한 방법은 없는 걸까?
ㅤ이런 점에서 저자는, 푸코의 권력 구조에 대한 분석, 그리고 말년의 진리-말하기를 꺼낸다.
ㅤ우리는 말 걸기의 장면 안에서, 합리적인 것 같은 말을 한다. 그러면서 너와 나의 진리를 서로가 확고하게 다지는데, 이는 권력이 작용하는 담론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나는 네게 원죄를 저지르지 않을 책임의 방법은 없냐고 말을 건다. 너는 내게 그런 방법은 없고, 나는 반드시 죄를 저질러야만 한다고 말을 건다. 이러한 장면은 내가 네게 방법을 강구할 권력을 적용시키는 것이고, 너는 내게 원죄적 책임을 묻는 권력을 적용 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속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그에 연관된 권력을 작동시키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ㅤ마지막으로 저자는 권력 구조 안에서의 위험을 감수한 말하기, 푸코가 언급한 그리스 고전기의 빠르지아(parrhesia)를 꺼내 온다.
ㅤ누군가는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한다.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감수할 만하지 않고, 꼭꼭 감추어 숨겨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너와 나의 사이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자기-방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한다. 하지만, 너와 나의 말 걸기의 장면에, 설득을 위해 내가 노출되지 않는다면, 내가 남은 것은 폐제의 방법밖에 없다. “나”는 너와 끊임없이 접속되어야 하므로, 위험하더라도 나의 삶을 공적으로 실연(enact)해야만 한다. 어떠한 권력과 진리가 나를 짓누르더라도, 비판과 또 다른 설득이 삶을 해체하더라도. 너와 나의 조건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ㅤ그러니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말이 걸리고 걸어지는 조건에 대해서, 말해지는 합리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네게 말이 걸리는 조건들이, 합리성이라 부른 진리와 권력이 분리될 수 없는 공모 관계에 있다고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네게 그 말해지는 권력을 파열시키거나 조정하면서, 저질러진 과오를 조정해 보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나 사이로 엮인 오류 가능성을 통해, 다시금 서로에게 말을 걸어 보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ㅤ그러면서, 책임감을 반드시 양심의 가책으로만 이룰 게 아니라, 공모된 권력관계에 노출됨으로써, 위험을 수반함으로써도 이룰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인해 어쩌면, 책임감을 침묵과 폭력으로 점철된 죄의 자행이 아니라, 네가 다른 사람을 보살핌으로써도 구성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너와 나는 단지 이러한 삶을 말하고 보여줌으로써, 원죄의 조건을 회피할 수 있는 책임을 구성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ㅤ<자기 자신을 설명하기>의 두 번째 독해는 참 힘들었다. 글자만 봤던 첫 번째 독해를 뛰어넘어, 이해 가능성의 한계까지 발을 뻗었어야 했어서. 간만에 키보드로 필사도 쭉 하고, 지피티랑 끙끙거리면서 씨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까지 달려가게 된, 다시 보게 된 동인은 그보다 더 강렬하기도 했다.
ㅤ역자의 말 끄트머리엔 이런 말이 나온다. 2005년에 나온 원서를 2016년에 번역본으로 내게 된, 수년을 고군분투한 책의 마지막 문장에 위로받았다면서. 정확히는 이렇다. “설득할 수 없는 것을 설득하려는 이 책의 수고스러움은 희망도 낙관도 불가능한 시대에 찬찬히 슬픔을 뜯어보라고 말하면서 슬픔의 무게와 절망의 진실성으로 위로했던 것 같다”라고 역자는 적는다.
ㅤ아는 것은 병이다. 하지만 모르는 건 무책임하다. 어떤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끝나지 않는 진리를 향한 방향 상실의 여정도, 눈과 귀를 막고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것도. 하지만 이조차도 기만이지 않던가. 상실과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위험한 말하기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던가. 그렇기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기도 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건, 어느 하나를 무시하는 것과 같으므로.
ㅤ그러니까, 병을 앓는 사람이 말하고 주장함으로써, 어떻게 또 다른 이에게 병을 옮기자고 말할 수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안다는 것은, 말하건 안 하건, 그 나름 나름의 죄책감을 짊어지는 것 아니던가. 우리 시대의 최우선이 되는, 기만으로 점철된 행복을 어떻게 그만두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고통 겪기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던가.
ㅤ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의 두 번째 독해는, 또 다른 종착점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예정되어 있던 죄책감으로 향했던 낭떠러지가 아니라, 어떤 가능성 속에서의 또 다른 간이역이라고 해야 할까. 윤리와 도덕률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에, 나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단정 짓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에게, 나는 또 다른 세계관을 제시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ㅤ우리는 매번 상황에 요구받는다. 그리고 언제나 응답할 수는 없다. 산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키우는 일이며, 그들은 또다시 다른 일을 벌인다. 누군가에겐 버틸 수 없는 짐이 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의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아니 나와 너는, 살아 남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반드시 이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ㅤ우리는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분명 용서받을 것이다.
*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을 변용.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 출처는 다음과 같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 이영철(역), 책세상, 2025. 143p
**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자기 자신을 설명하기』(Giving an Account of Oneself). 양효실(역). 인간사랑, 2016. 23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