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조카가 생겼다. 두 달쯤 전에. 전날 초조해하던 누나가 사진을 보내왔지. 별 감흥은 없긴 했다. 고생한 사람에게 한마디 한 정도. 그리고 한 달쯤 지나 첫 만남을 가졌다.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보다 10% 더 무거웠을 때쯤에. 첫인상은 뭐랄까, 신기했다고 해야 할까. 매번 보던 다 자란 어른들과는 아주 다른 외양이긴 했다. 식탁 옆의 작은 요람에서 눈을 감은 채, 거친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는 작달막한 입술. 새빨갛게 물든 체리알 같은 발가락에 묻은 투명한 김 가루 같은 발톱. 머리 뒤를 받치면 느껴지는 따스함과 몇 안 되는 머리카락.
ㅤ사람과 신생아. 그 구분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릿속의 사람과 조카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기 때문. 흉곽이 여물지 않아 들숨과 날숨에 뚱그런 배가 들락날락하는, 배고프면 누군가의 품에 안겨 꼭지를 문 채 꿀떡꿀떡 삼켜야 하는, 축축한 가랑이의 상황을 전하려면 뿌앵하고 울어야만 하는, 팔을 움직이려 하면 손톱으로 얼굴을 긁어 솜방망이 덮개를 씌워야만 하는, 이런 꿈틀이를 위한 말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에 기대어야만 살 수 있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고군분투인, 그런 사람을 위한 말이.
ㅤ참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다. 최대한의 힘을 다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의 관점에선 한량으로 보일 법했다. 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게 무슨. 하지만, 그게 누군가에 의해 길러진 결과라면 어떨까. 이제 막 태어나 위장 운동이 서투른 아기는, 묽게 타진 분유를 먹고 나서도 배앓이와 투정을 반복했다. 밖에서 잠드는 것조차 처음인 아기는, 서툰 양육자들에게 칭얼거리며 불만을 표하곤 했다. 배변조차도 익숙지 않은 아기는, 한참을 시뻘건 얼굴이 되고 나서야 울음으로 상황을 전했다. 다 자랐다는 건, 어쩌면 지나온 누군가의 돌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ㅤ꼬물이를 한참 지켜보다 해가 저물 때쯤에야 가정집에서 나왔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역사를 향해 걸으며, 지하철 좌석 구석에 앉아 머리를 기댄 채, 갖가지 잡념이 머리를 스치게 두었다. 누나는 이제 진짜 엄마가 되었구나. 자꾸 나를 닮았다는데, 허약한 것도 날 닮으면 안 될 텐데. 그렇지만 엄마가 좀 인자강이니, 건강은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듣고 보니까 두 명이 키우긴 좀 힘들어 보이던데. 이게 맞는 건가. 근데 이제 막 살긴 글렀네. 엄마가 어른이면 외삼촌도 어른일 테니. 집에 도착해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행실 똑바로 하고 다녀야겠음”
ㅤ여느 날처럼 빈둥거리며 스크롤을 내리다, 전파를 위한 사진 속 제목이 눈에 띄었다. 링크가 없어 직접 검색해 타고 들어갔다. 제목은 “나는 낳음 당했다”라는 말. 글의 내용은, “낳음 당했다”라는 말을 처음들은 쓴 이의 소감,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써 항변하고 싶은 동기, 결과로써의 세상에 대한 문제점, 자유로운 주체로써 충만한 가능성의 설파, 이 유행어가 한순간만 불타오르는 말뿐임을 바라는 미래에 대한 희망, 대충 이런 식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사람 역시, 이에 대해 말을 꺼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ㅤ낳음 당했다. 이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GPT에게 조사를 시켜보니, 몇 년 전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쏘아 올려진 말이다. 여과 없는 감정의 소여와 치부를 꺼내는, 허황 혹은 날 것의 진실이 판치는 곳에서. 말이 발명된 진원지의 특성상 어느 정도는 무시할 법하기도 하다. 하지만 음지에서 캐내어진 말이 양지까지 기어 올라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 잔인한 말의 단면을 살펴보면, 여태 방기해온 어느 흉측함이 드러나지 않을까. **
ㅤ누군가는 말했다. 인간은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의 존재며 삶은 원해서 시작된 게 아니라, 어떻게든 세상에 내던져짐으로써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은, 아직도 유명한 철학자로 꼽힌다. 또 누군가는 말했다. 비합리로 가득 찬 세계 앞에서,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는 어떤 명확함에 대한 요구, 그러나 비끄러매 미끄러지기만 하는 부조리. 그만이 인간 앞에 놓인 명확한 진실이라고. 그리고 그 또한, 어떤 시대정신 속 항변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주장들의 공통점은, 전쟁이 휩쓴 당대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랄까.
ㅤ역사가 낳은 개념적 무기를 통해, “낳음 당했다”라는 말에 대항해 볼 수도 있겠다. 이미 쏘아진 총알은 멈출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내던져지는 것 뿐이라고. 원하는 것은 언제나 이루어질 수 없고, 살아 있는 건 부조리를 응시하며 끊임 없이 돌진하는 것 뿐이라고. 너는 이미 태어났고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으니, 쏘아졌으나 목표 없음을 향해 꿰뚫고 가는 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한가지 의구심이 머리를 스친다. 살아 있음 앞에서 가능한건 오로지 기만의 태도 뿐일까.
ㅤ누군가는 이렇게도 반문할 수 있겠다. 단지 원하는 걸 안 사줘서 투정한 것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냐고.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작금의 상황은 명백히 어떤 현상을 보여주고, 이는 인간의 삶이 지닌 부조리성의 일부라고. 그러니 존재론적 투정을 툴툴대는 것으로만 볼 게 아니라, 셀 수 없는 숙고와 설득과 조사가 필요한 게 아니겠냐고. 어쩌면 “낳음 당했다”라는 말은, 수많은 방만 속에 버려지고 썩어 문드러진 것들이 낳은 게 아닐까. 그를 보고 기괴하다 손가락질하는 것은, 여태껏 감춰져 있던 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닐까.
ㅤ여기서 더 나아가면, 다들 반출생주의(Antinatalism)에 대해 말한다. 어느 번역가의 글에서도, 어느 기사를 보아도 그렇다. 이 단어가 시대정신의 명쾌한 묘사이고 그 철학이 누군가의 일부를 대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어느 표현의 궁핍함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또 다른 누군가의 일부는 작금의 말로 설명될 수 없었던 건 아닐까. 그는 스스로 입이 꿰매인 채 하루를 보내야만 하며, 곱씹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만 갇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에 서서, 당신들이 쏴버린 나를 향해, 반복을 멈춰야 한다고 삶으로써 뜻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ㅤㅤ출발선에 떠밀린다.
ㅤㅤ망설인 채 총열을 쥔다.
ㅤㅤ없는 표적지를 향해 조준한다.
ㅤㅤ발포를 알리는 신호가 들린다.
ㅤㅤ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ㅤㅤ하지만
ㅤ상황은 변했다. 투정을 부리기만 했던 날들은, 이제 들어주어야 할 날들을 비춘다. 커져 버린 머리는 더 이상 혼자만을 생각할 수 없고, 기대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아이는 계속해서 자라고,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 단지 더 어린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더 미숙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그들을 돌봐야만 하게 된다. 이 또한 탄생의 조건과 같다. 차이라면 조금 더 빠른 적응 하나 정도. 그러니 어른이라 불리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해야 하는 일이 느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무능력 또한 견뎌내야 하니.
ㅤ“나도 몰라. 그냥 찍는 거지.” 회사에서 한참을 따지다 들은 말이다. 결정권자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하며, 수많은 가능성을 다 고려해야 하지 않냐고 주장을 하다가. 들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는다. 어떤 조악한 상식, 어른이라 불리는 완벽한 미지의 존재, 그는 반드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하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 알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곁에 있는, 그런 인간상이 깨지는 지점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한참을 적응하지 못해서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곤 했지만.
ㅤ정말 무책임하네. 하고 생각하곤 했다. 누군가를 기르고 어느 정도는 숙련된 삶을 가진, 그러나 그 역시도 돌봄이 필요했던 사람 하나하나를 보며. 주로 날카로운 화살표가 향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문제를 들어 보임과 동시에 더 많은 문제를 만들었던 점. 그러면서 아무도 돕지도 않고, 단지 자신의 눈앞만 따라간다는 점. 되돌아보면, 나는 책임이란 말을 사전상의 의미와는 다르게 썼던 듯싶다. 나를 상황 속에 내던지면서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내팽개친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의미를 담아.
ㅤ미리 있던 사람들의 문제. 상황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은 누군가가 연루되어 만들어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도 휘말린다고 해야 하겠지. 하지만 그게 범죄라면, 휘말린 이들도 전부 공범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내 상상 속의 어른은 이러지 않았을까. 이 모든 인과율에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현시를 통해 상황을 밝혀내려 할 것이고, 보이지 않더라도 방향을 찾아내려 할 것이며, 해결할 수 없더라도 알아내려고는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미안하지만 같이 해보자고, 사과와 함께 손을 내밀어 보지 않았을까.
ㅤ탄생이라는 방아쇠, 찰나의 망설임, 귀를 스치는 파열음. 조카는 태어났고, 나는 미리 세상에 나와 있었다. 인과는 명백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하지 않은 건데 무슨 상관입니까?” 글쎄요. 앞으로는 상관있어지겠죠. “당신의 주장은 비논리적이지 않습니까?” 네. 그럴 수 있겠네요. 근데 개인적인 경험은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가요? “하여튼 내 알 바는 아닙니다. 알아두세요.” 네. 저도 하나만 말하자면, 제가 이렇게 된 건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입니다. 알아두세요.
ㅤ“나는 낳음 당했다”라는 말. 처음엔 이를 보고,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 생각했다. 나는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누군가는 축복과 함께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내던져졌다는 현시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뤄지지 않은 바램을 칭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부조리를 밝혀내야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어느 번역가의 게시글 속, 여전히 자신의 희망을 좇는 마무리, 이어지는 슬프기만 한 감상의 말들은, 도무지 이해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중요한 게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과 함께.
ㅤ그리고 또 다른 삶은 태어났다. 이 또한 내가 원해서 생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핏덩이가 자라서, 자신의 세계를 설명할 말을 찾아서, “나는 낳음 당했다”라고 내게 말하면 어떨까. 나조차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다른 삶의 당위를 설득할 수는 있을까. 도무지 할 말이 없어 침묵한다면, 아이는 외면당했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이, 또 다른 삶에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무책임하다며 속으로 던졌던 원망들이, 상황과 결과로써 내게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ㅤ그때가 온다면, 나는 무얼 말할 수 있을까.
* 밀리의 서재 : “나는 낳음당했다”는 말, https://short.millie.co.kr/qr8idy
** ChatGPT : “낳음당했다” 의 사용 흔적, https://chatgpt.com/s/t_68a00dc10cc8819193a839b055fe2b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