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갈팡질팡 치매동반기
엄마는 내가 자신의 치매 이야기를 공개적인 글로 쓴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할까?
아마도 질색팔색을 하면서 펄쩍 뛰었을 듯싶다. 당장 그만두라고 했겠지....
내가 생각하기엔 엄마는 자존심이 무척 센 편이라 자신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척 이성적이며 사무적인 모녀 관계를 만들었다. 특히 공부를 잘한 당신에 비해 공부를 잘 못하는 자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점수를 받고 잠이 오냐"
엄마가 나에게 남긴 많은 명언 중에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나를 공부로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나름 체념을 한 결과였을까? 엄마도 내가 신기했을 수도 있었을 듯하다.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책상에는 앉아 있었다. 단지 공부를 안 하고 다른 책을 볼 뿐이었다.
엄마는 누가 물어보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위의 친척들과 이웃은 내가 공부를 못하는 걸 몰랐다. 무척 행운인 점은 고등학교 입학이 무시험이어서 대학에 갈 때까지 보안이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엄하고 냉정하고 무서웠던 엄마도 나이가 들면서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변했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자식도 나이 들면 어려워지기 마련인가 보다. 지금의 내 상황을 봐도 그렇다. 내가 보기엔 아직도 어리숙하기만 한 자식이지만 나이가 드니 나도 어렵게 느껴진다. 게다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식에게 의지를 하게 되니 전세는 역전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날 아침도 다른 날과 같이 엄마의 아침을 차려드리고 나는 딸네 집으로 가서 손자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다시 집으로 와서 엄마를 데이 커어 센터에 보내야 하는 일정이었다.
집에 와서 엄마의 등원 준비를 위해 일단 세수와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엄마 방으로 갔다. 방안에 뭔가 환약 같은 것이 있었다. 1센티 정도 되는 색깔도 공진단 같은 색이었다. 첨엔 뭔지 모르니 집어 들었는데 그것은 엄마의 똥이었다. 똥을 손으로 굴려서 그리 동그랗게 마치 새알 옹심이처럼 만들어서는 방바닥에 버렸다고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생각난 말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였다. 그 말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선명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만약에 묽은 똥이고 자신은 그게 뭔지는 모르는데 불편함을 느끼면 엉덩이 사이로 손이 갈 것이고 손에 묻은 걸 벽에 문지르면 벽에다 똥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깔끔하고 정갈하던 사람도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 되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엄마는 먹는 양도 적고 배변도 정기적인 편이어서 나는 특별히 고생을 하지는 않았는데 이런 경우가 생기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손을 묶어 놓을 수도 없고 말해봐야 소용도 없으니 이런 일이 생기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옛날이야기에 노망 난 시어머니 밥 안주는 며느리가 이해가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엄마 방에 갔더니 방바닥이 흥건하게 물이 흘러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잠자면서 소변을 못 가리게 된 것이다.
혹시 주무시다 목이 마를 가봐 바나나 우유를 빨대를 꽂아서 놓아드렸는데 그것도 다 드셨지만
오줌의 양은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많았다.
일단 샤워를 시키고 시트를 갈고 정리를 했다.
그날 밤부터 나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세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서 화장실을 모시고 가야 하니 엄마는 실수는 안 하지만 나는 잠을 거의 잘 수가 없었다. 늘 피곤한 상태로 살아야 하니 몸은 물먹은 솜이불 마냥 축 늘어져 있었다.
데이케어 자조 모임에서 하소연을 했다. 모임에 참가한 분들도 보호사 분도 기저귀를 권했다.
첨에는 기저귀를 한다는 게 나 자신도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망설였다. 그러나 몸이 힘든 거에는 장사가 없었다. 열흘도 못 버티고 결국에는 기저귀를 사용하게 됐다. 기저귀를 주문하고 엄마에게 처음 입혀 드릴 때는 안 입는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런 저항 없이 팬티형 기저귀를 팬티 대신에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밤에만 착용하다가 낮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팬티형 기저귀 안에 일자형을 같이하면서
혹 실수를 하게 되어도 일자 형만 교체하면 되니 훨씬 편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도 아주 중요한 요령이었다. 데이케어 센터의 보호사가 알려준 팁이었다. 혼자 거기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반복했을까? 엄마는 기저귀를 하는 것에 대한 인식도 없는 상태인데 공연히 나 혼자 쩔쩔 매고 고생만 하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사용할걸 하는 후회도 했다. 이래서 먼저 경험한 사람의 충고가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쓰다 보면 엄청 고생만 한 것 같지만 그래도 틈틈이 나 할 일은 다하는 편이었다.
아침에 엄마와 손자를 보내고 나면 손자가 하원하는 5시까지는 자유시간이니 낮에는 친구도 만나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도 했다. 밤에도 약속이 생기면 모든 조치를 다 한 후에 세네 시간 정도는 외출도 가능했다.
이런 엄마를 보면서 아이가 처음 태어나 누워서 똥오줌 다 받아내 키운 걸 자식한테 다 돌려받고 가나보다 그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