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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ee Apr 25. 2024

갈팡질팡 치매 동반기

 1. 엄마 안녕~

안녕은 참 이상한 말이다.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쓴다.

나는 엄마와 헤어지는 준비 중이다. 종국에 헤어짐은 죽음이겠지만 중간 단계가 참으로 많을 것 같다.

내 인생은 엄마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아니 최근까지 지탱되었다. 엄마의 치매 증세가 깊어져서 더 이상 온전한 한 사람의 몫을 살지 못하기 전까지 나는 엄마에게 기대서 살아왔다. 마치 제 어미의 살을 먹고 자란다는 거미처럼. 특별한 일부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서 헌신하니까 이건 뭐 특별한 일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주 특별한 일이다. 특별한 일은 어렵고 힘들다.


문제는 부모의 역할이 역전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문제는 엄마가 항상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나온다. 엄마는 항상 어른이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자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미 엄마가 자기 자신도 추수를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처음 치매가 문제가 되었을 때 나는 한국에 없고 엄마는 혼자 사시고 계셨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번 나중에는 한 달에 두 번 서울로 와서 청소도 하고 드실 것도 챙겨 놓곤 했다. 지금에 와서 드는 후회는 그때 내가 서울에 있어서 엄마를 잘 챙겼으면 '치매를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때는 늦으리, 후회는 늘 자책을 남기기만 한다.


이미 결혼한 나의 딸은 외국에서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를 돌본다고 집 근처에  살림집을 마련해서 살고 있었다. 그 애도 직장 생활을 하는 데다 주말에 잠깐 보는 것으로 할머니의 이상 상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엄마의 치매는 진행되고  있었다.

엄마가 치매 진단을 위해 MRI촬영을 하는 건 휴가를 내서 내가 가고 진단을 받을 땐 딸이 월차를 내고 엄마를 모시고 갔다. 실은 한 집에 살아도 웬만한 관심이 없으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알아도 그게 치매의 전조 증상이란 걸 사실은 모른다. 치매에 관심이 없으니까. 부모님의 방에 과자 봉지나 재활용 스티로폼 그릇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일단 치매를 의심해 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전조 증상일 수 있다는 걸 모르니 그냥 "쓰레기는 좀 버리세요" 이 정도의 말을 하게 된다.

"다 쓸모가 있어, 버릴 때 버리더라도" 이러면 뭔가 환경보호 차원에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고 지나간다.

실은 나 같은 경우는 엄마는 알아서 잘 사는 분으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처음 진단을 받고 세 달에 한 번씩 진료를 받으러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이 연세의 노인의 일 년은 그냥 일 년이 아니고 굉장히 길고 중요한 시기다" 내가 받아들인 건 일 년이 십 년과 맞먹는다는 의미로 이해를 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나처럼 뒤늦은 후회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줄어들길를 바라서이다.


어느 날 엄마와 외출을 하는데 앞서 가는 엄마가 다리를 저는 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신다. 억지로 신발을 벗겨 보니 앞 발톱 부분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발톱을 깍지 않아서 발톱이 휘어지게 자라서 밥 톱 밑의 살을 파고 들어서 거기서 피가 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부모의 일은 부모가 얼마나 아플까? 힘들까? 이런 생각보다 화가 먼저 난다는데 있다.

"아우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주로 자식들이 하는 말이겠지. 나도 그랬다.

그다음의 그 발톱을 자르기 위해서 여기저기 외과를 돌아다니면서 겪은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한 병원에서는 젊은 의사가 아마도 40대 중반 정도 되었으려나.

한참을 쳐다만 보더니 발톱을 한번 건드려보고는 엄마가 비명을 지르니

" 아 이렇게 하는 분은 치료를 못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결국은 외과에서는 처치를 못하고 돌아서 나오면서 나는 가지가지 저주를 그 의사에게 퍼부었다. 물론 속으로만. 저주를 퍼붓다 든 생각이 힘들게 공부해서 변두리 동네 병원에서 일하는 그놈이라고 이런 일을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 좀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저주를 다시 회수하고 세상의 모든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 실은 아는 신도 별로 없다.


아마도 그 덕인지 돌아오는 길 집 앞 네일 샾에 " 내손 발톱 치료 전문"이란 배너를 발견했다. 독실한 카토릭신자인 울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 " 극복하지 못하는 시련은 안 주신다"가 여기서도 해당이 될 줄이야.

즉 우리 동네 네일 하는 집에서 해결 방법을 찾았다.  발을 따뜻한 물에 담갔다가 여러 번 갈아 내는 처치 방법을 사용했다. 참으로 우연인지 천우신조인지 울 엄마의 하나님이 보살펴서인지 네일 하시는 분이 어머니가 발톱으로 고생을 해서 학교 다니면서 특별히 발톱 공부를 하고 치료를 위한 기계도 다 구비하고 있었다. 치료를 위한 의자는 어찌 보면 안마의자 같기도 하고 치과용 의자 같기도 한데 어쨌든 의자에 도구가 연결되어 있었다. 발톱을 갈아내는 그라인더 같은 게 있어서 가위로 잘라내는 것보다는 훨씬 환자가 공포감을 덜 느끼는 처치 방법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갔으니 서로가 좀 익숙해지기도 하고 이 말 저 말을 하다 보니 편안해지기도 할 즈음 시술하는 분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 혹시 어머니가 다른 특별한 증상은 없으세요"

"특별히 아프신 데는 없고요. 치매가 약간 있으세요"

라고 이야길 했다.

그분이 아주 조심스럽게 이런 일이 초기 치매 환자들에게 많이 발생을 한다고 말을 해줘서 알게 되었다. 초기 치매 환자들은 발이 잘 안 보이니 발톱을 깎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발톱이 앞으로만 자라지 못하니 휘어지면서 살을 파고드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치매는 어느 날을 정해서 오늘부터 시작! 이렇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전조 현상이 있는 건데 그게 지나고 보니 아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 하면서 후회를 하게 된다. 빨리 발견하고 치료를 시작하면 호전은 안되지만 진행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평상시 늘 사용하던 세탁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 그런데 이때는 손빨래로 하는 게 좋아서 그런다는 등의 변명을 했는데 뭐 그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잘하던 바느질을 이상하게 꿰매 놓고는 잘한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다던지 하는 일이다. 통장에서 같은 금액의 돈을 몇 분 간격으로 인출하는 일, 보청기 혹은 틀니를 찾지 못한다던지 평상시와는 약간 다른 실수가 반복된다. 그때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지만 치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더 빠른 치료, 치료는 불가능하다니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약을 드시기 시작한 일년은 내 생각엔 좋아지신 것 같았다. 진료시에 주취의한테 이야기하니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할뿐이였다.


뭔가 조금 이상한 증상을 보일 때 빠른 진료와 정확한 진단이 중요하다.

엄마는 지금은 치매 진료를 받고 있고 약을 드시고 계시지만 치매인지 물어보는 것조차도 몹시 조심스럽고 불편한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또 병원을 신경 정신과에 가야 한다는 것도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환자 본인이 스스로 병원에 가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또 본인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정상인에서 점점 멀어지는 엄마를 보면서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말인지 알게 되었다. 환자도 중요하지만 옆에서 돌보는 가족에게도 몹시 중요한 일이다. 환자의 증상이 가벼우면 가족이 감당하는 일도 그만큼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참으로 냉정하게도 후회한들 이미 시간은 지나가고 난 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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