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백원 모음
2월 어느 날 무료했던 일상에서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라는 모임 공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백일 간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을 모으는 것인데 그냥 하는 것도 아니고 돈도 몇만 원 내고 신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무료 취미 동호회도 아니고 유료?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 그냥 지나칠 수 있었는데 마지막 환급 규정을 보고 신청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100일 중 90일만 달성했을 경우도 100% 환급! 그래, 해보자. 열 번 정도 안 써도 돈 다 돌려받는다는데 밑져야 본전, 아니 본전은 아니지만, 어쨌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량도 쓰는 사람 마음대로라고 하니 안 되면 한 줄만 쓰지 뭐, 그리 쉽게 생각해 시작했습니다.
사서 고생한다고 하지요. 그렇게 사서 고생은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나씩 글을 써야 했지요. 처음에는 주말에 미리 몇 개 글을 써서 비축해 두었다가 평일에 하나하나 꺼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주말은 그냥 주말이었고 주말의 시계는 더 빨리 밤으로 갔지요.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명상을 한 후 글을 쓰고 출근하는 모습을 그렸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 퇴근길 버스 안에서 글감을 생각합니다. 그나마 코로나로 인해 저녁 모임이 거의 없어진 상황이라 저녁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글을 쓰는 것이 가능했지요.
며칠을 쓰다 보니 일주일도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머릿속 글감은 다 떨어지고 이걸 어떻게 한 달도 아니고 백일을 하지. 신청금 칠만 원이 아까워지며 왜 이 짓을 했을까 후회도 되었습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어차피 90일만 쓰면 100% 환급된다고 하니 오늘 하루는 피곤해 건너 뛰어야겠다는 마음이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아니 매일 들었지요. 하지만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건너뛰면 다음 날도 마찬가지로 안 쓰고 넘길 것이라는 것을. 한두 해 살아봤나요. 저라는 존재와 반백 년 이상 살았는데, 그걸 모르겠습니까. 게으른 저 자신 무너질 것 잘 알기에 열두 시 땡 치기 전에 어쨌든 글을 꾸역꾸역 썼습니다. 신데렐라도 아닌데 12라는 숫자에 시침이 닿기 전에 글을 썼지요.
글 쓰는 것은 머리로 쓰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쓰는 것이지요. 글쓰기는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엉덩이로 쓰는 것이지요. 앉아야 쓸 수 있는 것이 글이니까요. 하지만 글쓰기는 엉덩이로 쓰는 것이 아니고 마감일로 쓰는 것이라 하지요. 저에게 열두 시라는 마감 시간이 없었으면 한 조각의 글도 쓰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한 달간 쓴 조각 글 모아 분량을 확인하니 51,355자, 원고지 307.8장의 글을 썼군요. 매일매일의 마감이 힘겹지만, 그래도 이렇게 3월 한 달간 매일 글쓰기를 마친 것이 대견합니다. 아직 69일을 더 써야 100일을 채운다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지만 어떻게 되겠지요. 안 되면 신청금 7만 원 날아가는 것밖에 뭐 큰일이 나겠습니까.
아직 백일의 1/3도 지나지 않았지만, 한 달간 매일 글 쓴 후 달라진 것이 뭐냐고요. ‘어떻게 되겠지.’ 열두 시까지 어떻게 되겠지. 지금 졸리니 자고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지. 그렇게 ‘어떻게 되겠지’라는 근거 없는 여유만 늘었습니다.
글의 ‘질’은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은 사치였지요. ‘양’이 ‘질’을 구축한다고 하는데 양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질이 조금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보며 오늘도 그저 ‘양’을 채우려 합니다.
오늘 분량은 이걸로 마칠 수 있군요. 휴, 다행입니다. 오늘 아예 제가 하고 있는 짓거리에 이름도 붙였습니다. ‘백원 모음’. 백일 간 원고 모음의 준말입니다. 이렇게라도 이름도 짓고 놀아야 어찌 버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미안합니다. 페이스북에 쓰잘데 없는 글 올려, 페북 서버 공간 차지했으니 신경도 쓰지 않을 마크 저커버그에게 우선 미안합니다. 하지만 제일 죄송한 것은 제 백일 숙제 글로 혹시나 페북 담벼락에 잠시 머물렀을 페친들 눈 더럽힌 것이지요. 죄송합니다. 79일만 참으세요.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