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배우는 대본을 쓰지 않는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촌철살인 한 줄 평으로 유명한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자신의 삶을 한 줄 평으로 멋지게 남깁니다.
‘되는 대로’라는 단어에 누군가는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요. 되는대로 막사는 것이란 느낌이 들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충실히 살면서 삶의 물줄기가 흘러가는 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되는대로’라는 네 글자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삶에 관한 한 줄 평을 그리 껄끄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지요.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지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철이 들어갑니다.
인생은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우리는 각자 인생의 무대에서 삶을 연기로 표현하며 사는 배우라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이는 이 역할을 멋지게 표현하여 박수를 받지요. 전체 대본에서 많은 대사가 주어지지도 않은 역할인데도 그 배우의 멋진 연기는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배우는 대본을 쓰지 않지요. 어제 찍은 대본을 몇 달간 미리 쓰고 있는 이는 배우가 아니지요. 내일 찍을 대본을 오늘 수정하고 있는 이는 배우가 아니지요. 배우는 그저 주어진 상황이 떨어지면 그 상황을 멋지게 표현하려 온 힘을 쏟습니다. 그 역할을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 애드리브를 치며 작품의 맛을 살리기도 하지만, 작품 전체의 대본을 쓰고 수정하는 것은 배우의 역할을 벗어나지요. 배우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어떻게 표현할지 애쓰기보다 작품 대본을 어떻게 수정할지 힘쓴다면 그 연극은 뒤엉켜버리겠지요. 왜냐하면 그 무대는 여러 배우의 삶이 어우러져 표현되는 무대이기 때문이지요.
흘러가는 인생 전체를 그대로 관조하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 아닐까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삶의 대본을 미리 써놓고 이 세상에 던져지지도 않았지요. 우리는 내일모레 찍을 삶의 대본이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오늘을 살아갑니다.
대본을 썼던 원작가나 감독에게 오늘 찍을 부분에 관해 의견을 표현하기도 하고, 가끔 대본에 애매하게 나온 부분을 애드리브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배우는 내일 찍을 대본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배우는 오늘의 장면을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2만 권의 책으로 꽉 찬 이동진의 서재를 보며 그에게서 오늘 하루를 배웁니다. 하루하루 충실히 살다 보면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굴러가겠지요. 인생이란 무대에서 배우의 역할은 오늘 주어진 대본 분량의 배역을 맛깔나게 표현하는 것일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