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을 벗어난 해결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불행을 수반한다.
욕망이 전혀 무용하거나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능력과 균형이 어우러져 자신을 한 단계 더 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욕망은 자신을 헤치고 관계를 무너뜨린다. 물론 비워야 채워진다는 말도 있다. 욕망을 갖지 말라는 소리로도 들릴 법하다.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지 욕망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비운다는 것은 모험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이다. 어찌 보면 버린다는 것 또한 더 큰 욕망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무소유든 욕망이든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하고 결국 잉여된 것들은 쓰임새를 달리 하게 된다. 이쁜 목재도 잉여된 것들은 불쏘시개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적당한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과잉된 것이 오랜 기간 정체되고 머물러 있으면 성질을 달리하게 되고 본연의 모습을 헤치며 결국은 본연의 것까지 망쳐 놓게 된다. 채워져 넘치는 것들은 함께 할 수 없고 분리되고야 마는데 말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 중 사람만이 자기 그릇을 벗어난 더 큰 것에 욕망을 드러내고 갖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정작 가져보아야 무슨 소용인가. 분수에 넘치고 쓰임새가 사라진 것들의 길을 열어주고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우주를 더 원활히 돌아가게 하고 자아가 있는 것들의 경우 더 발전된 의식을 갖는 존재로 남게 한다.
욕망을 드러내는 것의 쓰임은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을 알고자 하는데에 더 유용해야 한다. 자기 그릇을 넘어서서 세상의 것들에 욕심을 갖는 것은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즐길 수 있는 질의 양 혹은 베풀 수 있는 시간이나 열정을 무의미하게 소진시켜 버리는 것과 같다. 단지 보여지는 것 뿐인데 사용하기에도 난해한 것에 몰두하여 열정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이 제철에 새싹을 올리고 꽃을 피워 겨울이 오기 전에 다음 세대를 위한 열매를 맺는데 꽃의 화려함에만 빠져 열매 맺기를 꺼려한다면 그런 식물 종은 멸실된다. 그 멸실된 기운은 해당 식물 종이 아닌 다른 물상의 에너지로 전환되어 우주 혹은 기운은 질량을 보존하게 된다. 소소한 것을 얻으려다 전혀 다른 에너지가 되고 말기에 말이다.
우주를 보라! 많은 별들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지구 상의 많은 것들도 이와 다르지 않게 소멸되고 생성된다. 무거운 것은 무거운 대로 가벼운 것은 가벼운 대로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또 그것대로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엇 하나 도드라지게 앞서지 않고 주어진 시간과 계절을 기다린다. 지나치고 넘치는 것들은 도태되어 사라지고 다른 에너지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우주의 사이클은 아니 자연은 생성과 팽창 그리고 소멸의 단계를 맺는다. 소멸 단계의 에너지도 보이지만 않을 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시공간을 보아도 物我의 모든 것은 반복적으로 생성 소멸하고 있으며, 넘치는 것들은 덜 차있거나 필요한 곳으로 이동해 간다.
어느 분의 글에서 본 것을 적어 본다.
“하늘은 하늘을 버려야 빛을 얻고
강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얻고
꽃은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고”
이 글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면 나를 버려야 인간 본연의 생식 본능을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종의 다양성을 물아의 다양성을 갖춰 나갈 수 있다. 독점화된 권력이나 먹이사슬 체계가 단절된 동물들은 압도적 권위와 힘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퇴락하거나 사멸한다. 어쩌면 비워야 채워진다는 뜻과도 같다.
하늘이라고 비유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비유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하늘이란 무엇인가? 질소와 산소 등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빛이 투과됨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이다. 빛이 통과하더라도 굴절을 만들고 파장을 일으키는 질소와 산소 등이 없다면 파란 하늘은 볼 수 없다. 태초의 진창과 같이 암흑일 뿐이다. 우주공간이 왜 검게 보이는가? 어쩌면 우주 공간도 태양빛이 통과하니 지구의 하늘과 같이 빛이 나야 하거늘 그 많은 양의 빛들이 지나고 있음에도 그저 암흑일 뿐 파랗게 보이지 않는다.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난 비어 있는 공간인 우주는 자신이 더 넓은 하늘이라고 우겨봐야 질소 등의 기체 요소와 불러주고 바라보는 이들이 없으면 빛이 빛이 아니고 하늘이 하늘이 아니다.
어쩌면 하늘은 자기를 버린다기보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 하늘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 것만큼의 양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빛을 낼 수 있고 충분히 다른 요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늘이기에 말이다. 결국 하늘을 버려야 하는 비움에서 다른 것을 채움으로써 진정한 하늘이 될 수 있다.
강이 강을 버려야 바다를 얻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지 아닐까. 강에게서 바다는 무엇일까? 최종의 목적지 일까? 바다는 모두가 가고 싶어 꿈꾸는 곳일까? 바다가 되어야만 꿈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이 든다. 강의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아마도 소금기가 없던 강물이 짜디 짠 소금기를 머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옹달샘에서 시작한 강은 그동안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오면서 바위에 부딪히는 수난과 수초와 미생물 그리고 물고기들의 쉼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자랑하고 싶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전체 자연의 입장에서 그것만 가지고 바닷물이 될 수 있을까? 아님 너는 이제부터 바닷물이야 하고 스스로 인정해 준다고 바닷물이 될 수 있을까!
결국 스스로 짠물을 내어야 바닷물이 되는데 말이다.
자신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끊임없이 낮은 데로 흘러야 만이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구름으로 증발할 것들은 그것들대로 동식물의 갈증을 풀어줄 것들은 그것들대로 소명을 다하고 그러한 가운데 남아 있는 것들은 지금까지의 머무름과 증발됨과 동식물들의 성장 요소로 사용되는 것 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어 놓아 비우고 자기 범주 안에서 담을 수 있는 것들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무던하게 해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꽃이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맥락이 같다. 충실히 아름다운 꽃망울을 가져야 한다고 꽃의 종류나 크기 등과 맞지 않는 지나친 일조량이나 물을 가지려 한다면 조숙한 성장 등 정상적인 생육을 이어갈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은 소멸의 길을 재촉할 뿐이고 그 에너지는 해당 식물 종이 아닌 또 다른 우주의 에너지로 이동할 뿐이다.
시공의 흐름을 알고 균형감 있는 욕망을 가질 때만이 현재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서를 유지해 갈 수 있다. 결국은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게 영원히 꽃으로만 있고자 한다면 그것은 말려진 조화이거나 박제된 동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