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by 이상훈

문 앞에 안개 벽이 처진 듯하다.

안개가 그 시절 왜 생기는지 알지는 못했다. 집밖에 설치된 화장실 가기에도 두려움이 앞서던 시절이다.

그 안갯속을 뚫고 한 나그네가 새벽대문을 두드리고 들어선다. 얼핏 아는 얼굴이다. 학교 가는 길에 위치한 그 집 사람들은 여름이나 가을철이면 나무에서 복숭아나 과일을 밭에서는 꽈리 등을 따서 아이들에게 팔았다. 그렇게 얼굴만 알게 된 사내가 방울이 달린 국방색 털벙거지와 수염 그리고 눈썹 위에까지 서리로 온통 하얗게 분칠한 몰골인 채로 나타났다.

그 사내의 몸에서 대뜸 쾌쾌한 담배냄새가 가득 묻어 나왔다. 부엌 아궁이로 발길을 옮긴 사내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꽁꽁 얼어버린 군화와 서리로 뒤덮인 국방색 야상 윗도리를 두손으로 털고 아궁이 앞에 몸을 밀어 넣듯이 쪼그리고 앉는다. 아궁이 속에 불을 지피던 아버지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 내 다시 발길을 재촉해 나섰다.

어쩌면 지금 나의 집에 들어선 것이 새로운 삶을 다시 부여 받은 것일지도 모를텐데 겨우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마음뿐 일 텐데. 숨을 돌리자마자 발걸음을 돌린 건 아마도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절 애태우던 가족들을 나몰라라 하고 집을 나왔다는 죄책감에서 이었을 까! 아마도 그건 아니었었을 듯 싶기도 하다. 그에게 그런 기색을 찾을 수 없었을 뿐더러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느꼈던 그 남자의 태도는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기에 말이다. 어쨌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에 자신의 무고함을 며칠째 전하지 않은 채 화투장을 비볐던 자신을 책망하거나 놀음방에서 모든 돈을 잃어 심신이 몹시 지쳤을 것이라는데 더 마음을 두고 싶다.

내가 살았던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중심부의 가장 외곽이었기에 이웃마을에서 보면 제일 먼저 접근할 수 있는 곳이기는 했다. 그의 집은 내가 살았던 집으로부터 족히 3킬로미터는 더 안개 속을 헤쳐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잠이 들어 불을 밝히지 않았다면 그 사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마도 어둠과 안개로 가득한 겨울 왕국의 어느 낯선 곳인지도 모른다. 저 체온 증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온 길을 뒤밟아 가야했거나 사방이 안개로 가득해 개 짖는 소리조차 가두어진 곳을 헤매다 운명을 다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 새벽부터 구들장을 따스하게 해놓으려는 아버지 덕에 그 사내는 안개 속에서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들판은 온통 하얗고 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이다.

한 치 앞을 허용하지 않는 안개로 자기 집 방향을 놓쳤을 법 했던 사내는 그렇게 자기 집으로 향해 다 식은 구들장에 몸을 누이고, 며칠 꼬박 밤을 세운 대가로 그의 아내로 부터 귀 따갑게 잔소리를 들었을 것 같다.

그 시절 그 동네의 안개가 그렇게 짙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海霧였을 것 같기도 하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는 서해에서 깊숙이 들어앉은 灣이 자리하고 있기에 말이다. 灣의 가장자리 갯벌에는 서리를 맞은 갈대가 수북이 올라 어둠 속에서 보면 땅인지 바다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눈으로 가려진 발밑의 구렁텅이로 미끄러지거나 하는 것은 그리 흔하지도 않은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그렇게 안개가 짙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해무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듯싶다. 그 지역의 灣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얼음을 얼개 하지도 않았고 간혹 얼음 덩어리들이 갯벌에 박혀있는 모습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요즘이면 참 멋진 광경이었을 텐데 춥고 이동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에 그런 모습은 어린 기억 속에 불편하게 남아있다.

화장실도 집 안에 있지 않고 뒤꼍에 만들거나 문밖 창고 옆에 적당한 크기의 송판으로 혹은 흙벽돌로 가림 막을 해 만들었는데 판자사이나 흙벽돌 사이로 귀신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그 소리는 얼음물에 손을 담근 것처럼 찬바람에 드러난 엉덩이와 사타구니는 물론 앙증맞은 가슴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툇마루 밑의 눈 쌓인 고무 털신을 눈을 털어내 신고 왔으나 섬유질 틈 사이로 반짝이는 눈가루가 완전히 제거 된 것은 아니어서 조금만 지나면 차디찬 물기가 발바닥을 적셨다.

그맘때 눈이 내린 겨울이 되면 그 동네에선 길을 찾기 쉽지 않았고 밤에 다른 동네로 외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생각하기 쉽지 않다. 지금의 코로나 시국처럼 모두가 사랑방이나 안방의 이불 속에 두발을 넣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지 않았다. 가마니를 만들거나 일부러 새끼를 꼬고 빗자루를 만들었다. 방안은 온통 검불 천지였지만 지금 같이 개의치는 않았다. 그 가운데 특별히 활동적인 이들은 그런 환경을 이겨내고 밖으로 돌았다. 눈에 갖힌 토끼를 잡아오거나 들판에 약을 놓아 천둥오리를 잡았다.

겨울철 농한기를 맞은 많은 특별히 활동력이 왕성한 이들은 볏가마니를 팔아 돈을 만들고 유흥을 위해 관광지였던 온양 등의 춤판이 있는 곳으로 돌았다. 아주머니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농한기의 동네 5일장은 항상 인파로 넘쳤다. 장터의 술 인심도 넉넉해 장에 갔다 온 이들 중 얼굴이 붉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다.심하게 표현하면 만주 벌판 같이 넓었던 그 동네를 灣 건너 지금은 선우교라는 다리를 건넌 선장지역의 산에서 내려다보면 그렇게 넉넉할 수 없다. 배를 곯았던 60-70년대엔 많은 처자들이 시집을 오고 싶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지역이기도 했다.

지역 경제는 평균적으로 그러했을지 몰라도 집집마다 살림살이는 제각각 달랐다. 다만 외부 자연환경은 모든 이게 공평한 듯 심각했다. 겨울바람이 귀를 뻘겋게 달궈 놓는 날이면 눈바람은 더욱 더 벌판의 논과 논둑, 밭과 밭둑의 경계를 허물고 하얗게 채워 놓았다. 그나마 자주 다니던 길의 모양새 정도만 짐작과 조심으로 찾을 수 있었다. 초행길이나 어둠이 내린 시간에 타지를 방문하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어르신들도 사랑방에서 두문불출하며 눈이 녹기를 기다렸고, 할머니들도 심심풀이라도 하듯 커다란 가마솥에 조청을 끓였다.

건조한 겨울바람은 눈이 내리지 않아도 바닥 깔린 눈을 쓸어 담아 공기 중에 흩뿌리기도 했다. 양지에 쪼그리고 앉아 해바라기를 할 때도 그 바람은 벌어진 옷자락 틈사이로 눈가루를 가지고 들어와 온 몸의 세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바람은 또 햇볕을 향해 드러낸 얼굴에도 선홍빛 실핏줄 같은 가느다란 상처를 혹은 굵직한 피부 홈을 만들어 냈다.

음력 설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면 어머니들은 가마솥에 물을 데워 아이들을 단체로 목욕을 시켰다. 그런 날 터진 피부에 덕지덕지 때가 끼어 있는 아이는 때수건의 까칠함 보다 갈라진 피부속으로 느껴지는 통증이 더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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