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이 별빛보다 더 눈이 부시게 반짝인다.
가끔 소설책에서 등장하는 북풍이 순간적인 몸동작을 하면 음지의 얼어붙지 않고 움츠리고 있던 눈 알갱이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퍼져나간다.
앞마당 먼 곳에서 시작된 눈바람은 툇마루나 사랑채 마루에 살포시 눈가루를 뿌리고 지난다.
사랑채 마루에서 햇볕을 쪼이던 아이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별일 아닌 듯 재잘거림을 이어간다.
평화로운 모습이다.
매일의 일상이 이러하다면 어떨까?
성인들이라면 지루함에 몸부림을 칠지 모를 일이다.
성인들 다수에게는 평온함 이상으로 무엇인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말이다.
이런 시국에는 명상도 좋겠다.
그런데 실상 명상에 빠져 시간을 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명상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고 공간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종교인이라면 묵상과 기도가 어울릴 법하다.
평온한 시기의 지루함이나 권태로움을 이기려면 평온함을 보낼 수 있는 다양한 이용방법을 찾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란 익숙해진 환경에 쉽게 권태로움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무기력한 평온함에 감사하는 것보다 적당히견딜만한 긴장감이 더 효과적이다.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나설 필요는 없겠다.
대부분의 삶 자체가 고통이고 스스로 찾지 않아도 적당한 희노애락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 이왕이면 극한의 고통 속으로 빠져보는 것을 생각하는 이도 있겠으나 대부분 극한의 고통을 회피하고자 긴 시간을 언제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감정을 소모하고 있거나 혹은 약한 형태의 고통과 매일 매일 동행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툇마루에 앉아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이내 토방으로 내려와 사금파리로 선을 긋는다. 편을 정하고 무슨 게임인지 알 수 없는 놀이를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불러주는 가운데 웃음소리와 다툼 소리가 번갈아 가며 공간을 메워간다.
그렇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도 해야 한다.
김춘수 시인이 쓴 꽃처럼
누군가가 불러주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상대가 없는 나는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는 코로나 19 확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 통에 집 밖 외출을 거의 못하고 계신다.
이웃집 방문도 어렵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에 온몸이 마비된 듯 느끼면서도 구부러진 등과 관절염으로 뭉툭뭉툭 튀어나오고 비뚤어진 손가락 마디로 김치뿐인 식사를 준비하시거나 조용히 기도를 드리며 기나긴 시간을 자신과의 싸움으로 보내시는 듯하다.
우리 삶은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누구나 인생에 커다란 변환점을 가지고 있다. 무수한 사건사고가 있었다. 그렇기에 포기하지 않은 삶에는 역경을 헤치고 나온 훌륭한 남에게 자랑할 만한 역경 스토리가 있다. 그들의 스토리를 보면 연속되는 사이클을 그려나가듯 고조되기도 하고 평온을 찾기도 했다.
삶은 그렇게 아무 일이 없을 시기에는 아무 일이 없는 대로 바람 잘날 없는 시기에는 그것들대로 종착 역을 향해 달려간다. 마음은 어느 시기이든 충만한 기쁨보다 순간순간 밀어닥치는 혹은 스멀스멀 울려 나오는 불편함이 있을 때가 훨씬 많다. 마음은 항상 나를 온전하게 두지 않는다. 어쩌면 평온한 시기에도 마음은 즐기지 못하고 지루한 상태로 있거나 평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진돼 버리기도 한다.
실상 삶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배운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과 배우지 못한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으로 부터의 배신 등이다.
나의 삶을 통해 결론에 도달하기는 힘들지만 나의 삶이므로 내가 스스로 판단하건대 삶은 단출하게 관계를 성숙시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정답이 없는 삶이지만 유대와 유대를 돈독히 하는 방법의 이해와 그 방법적인 것에 대한 연습이라고 본다.
코로나로 오래 비워진 노인정의 북쪽으로 난 창문이 겨울바람에 흔들린다.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