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일주일 이상을 단주했다.
해마다 부친 기일에 즈음할 때면 영락없이 만취를 하곤 했는데 올해는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아버지 기일에 몸을 정숙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그동안은 해마다 제사 며칠을 앞두고 꼭 술을 분에 넘치게 마신 경우가 많았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버지도 아버지가 불행하다고 여기셨을까? 아버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뭐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해본다.
기억 속에 의미를 갖지 않고 떠오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다.
눈이 내린 새벽녘 어두컴컴한 밖에서 등교하는 아이가 혹은 이웃 사람들이 보행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눈을 치우시는 모습이다. 또 하나는 아이들이 자는 방에 군불을 때시는 모습이다. 어느 시절에는 탈곡기를 만드셨고, 어느 시절 즈음부터는 간단히 집을 직접 짓기도 하셨다. 겨울철에는 직접 토끼나 돼지 잡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느 날엔가는 그림 화집을 가지고 오셨고, 어느 날인가는 사람 얼굴과 동물 등이 연필로 세묘 된 다 떨어진 스케치 북을 가지고 오기도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 가사시간이나 기술 시간에 철사를 꼬아 만든 석쇠를 만들거나 책장을 만들기라도 하면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 말들을 많이 듣기도 했다.
할머니의 기일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몇 살 때인지도 알지 못지만 내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할머니 제사를 지낸 적이 있다. 할머니 제사를 지냈기에 설 명절에도 일부러 먼 곳에 있는 할아버지 댁으로 차례를 지내러 가지 않았다. 대신 이웃한 큰 조부 댁으로 가서 차례를 한 번 더 지냈다. 큰 조부 댁으로 가는 길은 좁다란 논둑길을 걸어서 논두렁 물이 잘빠지도록 둑 밑으로 관을 묻거나 둑을 허물어 내고 그 위에 자그마한 나무판자로 다리 놓은 곳을 지나야 했다. 그러고 나면 형제들이 많아 부러웠던 정 씨 성을 가진 집을 마주하게 된다. 길은 그 집 앞의 텅 빈 돼지우리 옆으로 나 있었다.
그 길과 이어진 마당을 지나면 또 다른 집이 나오고 그다음이 큰 조부 댁이다. 큰 조부 댁은 두 채의 일자형 구조가 담으로 이어진 형태였고, 지금은 다른 이가 양옥으로 개조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아버지는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초등학교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나 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많은 누나를 제외한 3형제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부모님이 도시락을 가지고 오셔서 가족 모두가 함께 식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가을 운동회 날이면 모처럼 용돈을 두둑이 받은 아이들로 문방구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점심시간을 맞은 운동장 가에도 장난감을 파는 장사꾼들이 아이들을 꾀고 있다. 아이들은 장난감 권총을 사고 플라스틱 칼이나 플라스틱 손목시계를 사고 태권브이 마스크와 아톰 마스크를 산다.
이런 운동회 날을 제외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부재중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의 점심은 개인 자율이었다. 다만 선생님들이 혼식을 유난히 강조했다.
요즘 같이 학교급식이 시행되지 않아
집이 학교에서 가까운 친구들은 점심시간을 충분히 이용해 집에서 가서 먹고 왔다.
나의 집은 학교에서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지만 옆집 아이들과 함께 가끔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가기도 했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고 해서 요즘 부모들 같이 점심을 차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솥단지를 열고 그 안에 담긴 밥그릇을 꺼내 먹는데 밥그릇은 약간의 온기를 느낄 정도였다. 찬장에서 반찬을 부뚜막에 꺼내 놓고 쪼그리고 앉아 식사를 하고 난 후 개수대에 빈 그릇을 담그고 나오면 그게 나의 점심이었다.
점심을 하고 아버지 마음처럼 텅 빈 봄가을 논을 가로질러가면 훨씬 빠르게 학교에 갈 수 있다.
빈 들판을 걸을 때에는 늘 논바닥이나 논두렁길을 같이 걸었다. 어쩌다 장난을 치는 날에는 논둑길 옆 물 웅덩이에 빠져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부재중인 부모님은 어디 계셨을까?
아마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논밭에 계시거나 직장에 나가셨거나 동네일을 중재하시는 중일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들 걱정에 일을 마무리하면 노심초사하며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오시려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아이들 돌봄을 거의 생각하지 않으신 듯하다.
그러면서도 언뜻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하나 추가하고 싶은 것은 아버지가 사주셨던 작은 꼭두각시 인형이다. 팔다리 목이 실로 연결되어 실을 잡아당기면 여러 가지 형태의 몸동작을 표현하는 인형이었다. 그걸 들고 동네 끝까지 가보곤 했다. 내가 가본 동네 끝 집에도 이형철근을 박아 만든 돼지우리가 있었다. 빈 돼지우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돼지우리 앞으로 시궁창이 있었고 돼지우리에서 흘러나온 돼지 배설물들로 파리들이 우글거렸고 역겨운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어느 해 할머니의 제삿날이다.
이웃에 살고 계신 당고모님과 5촌인 당고모님의 따님들이 오셔서 호롱불 아래 인절미를 만들고 전을 부치신다. 어린 시절 조그마했던 우리 집 부엌 안이 시끌벅적하다.
당고모님이 연세가 있으셔서 누님이라 하더라도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엄청났다. 그분들이 함께 제사 준비를 하시는데 아버지는 밖에서 나와 놀아주셨다.
여자들이 하는 일에 할 일이 없어서 일까? 내부 공간에 쉴 자리가 없어서 일까?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하신다. 아버지가 두 살도 못되어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어머니 제삿날은 집 앞 밭에 심어져 있던 바늘이 무릎 근처까지 자랐던 때였다. 아마 양력으로는 4~5월이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가 불꽃놀이 폭죽을 어디서 인지 가지고 오셨다. 사위가 캄캄했던 그날 아버지가 폭죽에 불을 붙이자 갈지자로 화염을 내며 날았다. 엄두가 나지 않는 나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만 지켜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내게 불꽃놀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듯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 그런 것을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모습이 나를 위한 것인지 당신을 위한 것인지 구분이 모호하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제삿날에 왜 나와 놀아주셨을까?
나에게 아버지가 놀아준 기억은 그것이 전부일 정도다.
폭죽놀이를 했던 그 당시 아버지 나이는 아마도 30대 중반이시지 않았을까 싶다.
왠지 젊음이 느껴진다.
자식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을까?
아버지는 내 위로 형님 두 분을 더 두셨는데 질병으로 잃으셨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과 삶에 대한 불안감은 아버지를 늘 힘들게 했을 듯 하다.
얼마 후 할머니 제사는 대구에 계신 아버지의 형님 댁으로 모셔졌다.
20대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지인들과 이웃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가진 것 없었고 무서운 것도 없었던 듯하다. 컷팅을 하고 포마드를 발라 넘겨진 헤어스타일과 국방색 점퍼는 당시 유행했었나 싶게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이 온통 그러했다. 거기에 쌍꺼풀 진 눈과 빙그레 웃는 둥그런 호남형 얼굴로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아버지를 멋있게 바라봤다.
자식을 잃어 본 30대의 아버지는 더 많은 것이 변했을 것 같다.
보이는 것도 성격도 많은 차이를 보였지 싶다.
보이는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스스로 좋아서 드셨는지 어쩔 수 없이 드셨는지 몰라도 말이다.
이웃 동네부터 바로 옆집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가는 집 모두 하루가 멀게 자신들의 삶을 논하고 술을 대접했다. 당시에는 집에서 가양주를 담지 못하도록 했었다. 일제 식민치하의 잔재였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관에서 밀주를 담그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관원들이 급작스럽게 집집마다 들이닥쳤다.
어렸을 적 친척집엘 가도 아버지는 어른들하고만 대화를 하시고 음식을 드셨다. 내가 어쩌고 있는 것은 거의 상관을 하지 않으신 듯하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멀지 않은 외가에 갈 때가 생각난다.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었는데 그러려면 상당히 돌아가는 꼴이고 버스비도 발생하니 어느 날인가는 배를 타고 바닷물이 들어온 갯벌을 건넌 기억이 있다.
나루 입구에는 초가집이 한두 채 있고 느티나무가 버티고 서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연회비 내듯이 1년에 한차례씩 쌀 한말을 자루에 담아 배를 젓는 사공에게 주는 것 같았다. 선착장도 따로 없었다. 배를 타기 위에서는 양발과 신을 벗고 갯벌에 발을 담그기도 해야 했다. 간혹 배에서 내려진 널빤지를 디디고 타기도 했는데 배가 작고 움직임이 심해 오히려 더 불안을 조장했다. 만의 폭은 한강을 건너는 길이보다 작았다. 만 건너편 나루터에도 자그마한 가게 같은 것이 하나 있었던 듯싶다. 그리고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가면 도고역이다. 역에서 철길을 따라 2킬로미터 정도 더 서쪽으로 가면 외가에 도착한다. 아버지는 가끔 자전거 뒤쪽 짐칸에 나를 태우기도 했으나 철로에 깔린 진동 방지용 자갈 덕에 자전거가 통통 튀어 올라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았다. 외가의 뒤 곁엔 검은색 염소가 몇 마리 있었고 낯선 어린아이가 귀찮은 듯 노란색 눈자위에 검은 세로줄 무늬를 한 눈을 부릅뜨고 뿔을 들이댔었다.
중학교 때인가 학교를 파하고 읍내 시장을 지나오는데 장날이었는지 아버지를 뵌 적이 있다.
겨울 어느 날이었나 영화에서처럼 고등학교 다니던 형님들이 미팅을 하던 빵집으로 같이 하교하던 친구 몇몇을 함께 데려가서 찐빵 한 쟁반을 사주셨다.
말년에 아버지의 술을 드시는 횟수는 여전한 편이었으나 수려한 외모는 많이 변했다. 피부는 더욱 꺼메졌고 구레나룻 와 턱 주변엔 흰 터럭이 까슬까슬하게 돋아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