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도 그러는지 잘 모르지만 난 폴라티나 니트 등의 옷을 좋아한다. 예전에야 체중도 많이 나가지 않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라서 그런지 블랙 색상의 몸에 딱 달라붙는 스타일을 선호했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절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이니 햇수로 16년이고 겨울이 같은 햇수만큼 지났다. 어느 해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머니께서 겨우내 손뜨개로 만들어 주신 단추 달린 털실 스웨터를 입고 다녔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털실이었던 것이나 몇 해 전에 떴던 것을 풀어 재활용 차원에서 다시 뜨고 하는 바람에 부드럽고 매끈매끈했던 털의 감촉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낡아 있는 핸드 메이드 스웨터다.
아마도 어머니가 아버지나 외할머니께 떠 주셨던 것을 그분들이 입지 않으시면서 실을 풀어내 디자인만 바꿔 다시 뜬 것이다. 털은 없어도 추운 겨울 실내에서만 입고 있으면 옷맵시는 여전히 괜찮았다.
기억을 들추는 것이기에 어쩌면 그 스웨터가 내 것이라고도 단정 지을 만한 것은 없다. 딱히 주인이 없었다고 보아야 마땅한 듯하다. 누구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아 실내에서 입고 지내다 급히 나갈 일이 있으면 더 이상의 겉옷을 걸치지 않고 나갔다.
교복을 입던 시절에는 사복이라 봐야 운동복이 전부였다. 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시골에 내려오면 긴 겨울밤 친구들과의 밤샘이 다반사다. 바람이 없는 날은 다리 위에서 불을 피워놓고 한기를 쫓아내며 놀았고, 친구 집에라도 갈 양이면 친구 어머니께서 준비해 준 맛있는 음식을 놓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런 모임은 급작스럽게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집안일을 돌보다 잠시간의 외출로만 생각한 것이 간혹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잠시간의 외출에는 움직임이 거북했던 모자 달린 하프코트 스타일의 점퍼로 갈아 입는 것 보다는 실내에서 입고 있던 스웨터가 편리한 것이 많았다.
단점이라면 스웨터 섬유조직이 성글지가 않다는 정도였을까. 스웨터 한면을 두 손으로 잡아당겨 보면 코와 코 사이가 숭숭 구멍난 것처럼 보인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그나마 견딜 만한데 바람 부는 날 내복조차 입지 않은 날이었다면 온 몸이 오들거려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어머니가 이 번 겨울엔 큰할아버지의 스웨터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신다. 상업용 만들어진 선물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정성이 담겨 있는 핸드메이드 스웨터가 더 소중한 선물일 수 있어서 일 수도 있고 값 비싼 선물을 준비하기에는 부담이 되었기 때문일 수 도 있다.
내가 기억하기에 손뜨개질로 만든 스웨터는 하단 부위가 외부 냉기의 유입을 차단하도록 10센티 정도의 길이로 약간 오므라지게 제작됐다. 이 부분은 옷의 앞판과 뒤판이 모두 크기와 문양이 같다. 어머니는 허리춤에 걸치게 될 스웨터 밑단 사이즈가 선물 받은 분의 체격과 맞는 지를 어림짐작으로 측정했다. 때문에 좀 더 실측에 가깝도록 하기 위해서는 체격이 비슷한 이의 몸에 제작된 스웨터 밑단을 자주 갖다 대고 비교해 보셨다.
어머니가 만드시는 스웨터는 보통 앞판에 문양이 들어가고 뒤판은 플랫 하게 되어 있었다. 또 앞 트임 스웨터의 경우 좌우를 잠글 수 있도록 단추나 지퍼가 연결되는 부분이 두 겹 일 정도로 두껍게 만들었다는 기억이다. 아마도 단추나 지퍼의 활동성을 감안해 잦은 여닫음을 하더라도 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스웨터 밑단의 사이즈가 정해지고 10센티 정도의 밑단 손뜨개를 마무리하면 이어서 코 날수와 뜨개 방식을 변화시켜 본판을 만든다. 앞판 디자인은 옷감 소재나 선물할 사람이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스타일을 고민하시는데 보통 재활용된 손뜨개는 민자 방식에 마름모 모양으로 별색 실을 집어넣어 제작했다. 새로 구입한 털실로 제작할 경우엔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세줄 꼬아 엠보싱 같이 두드러지게 뜨개 하는 패턴을 넣기도 했다. 문양이 일정한 패턴으로 이어지도록 바느질 코는 해당 콧수에서 정확히 비틀림을 하거나 패턴에 맞도록 변형했다. 나 자신이 전혀 뜨개질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예를 들자면 일반 뜨개 방식으로 코를 10번 꿰고 다음 3번을 비틀어 꿰고 열 번은 일반 방식으로 뜨개질하는 것이다.
뜨개는 밑단에서 겨드랑이 라인까지 일정하게 이어져 오다 겨드랑이 부문에 다다르면 뜨개 질 코 수를 일정하게 줄여 나간다. 어깨 부분에 도달하면 한 판이 마무리된다. 물론 디자인에 따라 목 부분의 곡선 형태도 감안해야 하므로 스웨터의 뜨개는 벙어리장갑 보다 훨씬 복잡한 코 수 계산을 요구한다.
목 부분을 둥그렇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앞판을 뒤판과 동일하게 통으로 할 것인지 혹은 앞판을 트임으로 해서 지퍼나 단추를 부착할 것인지에 따라 코의 수는 매번 달랐고, 어머니는 코 수를 세고 또 세시기를 반복했다. 뜨개는 분리 제작된 기계를 최종적으로 조립하듯이 팔 두 쪽, 앞판 두 쪽, 등판 한쪽 등 대체로 다섯 판으로 따로따로 제작되어 합쳐지게 된다. 혹여 트임 부분과 목 부분을 다른 양식으로 두툼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모두 6쪽이 제작될 수도 있다.
어머니의 손놀림이 분주해진다. 지금 생각하니 코바늘도 참 다양하게 구비해 놓으셨다. 코바늘 중에는 손뜨개한 옷감이 코바늘을 벗어나지 않도록 좌우 바늘 사이에 길게 플렉시블한 줄로 연결한 것도 있었다. 뜨개바늘의 종류도 철과 플라스틱 재질 등으로 다양했다. 바늘의 끝부분은 부드러운 낚시 바늘과 같이 홈이 파이게 만들어졌다. 단순한 일자 형태의 코바늘만 보아오다가 해마다 다른 모양의 코바늘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내심 신기했다.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세상에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난 지역사회의 친구들이나 직장 친구들과 초등학교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린 시절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의 초등학생 시절은 베트남 전쟁이 막 끝나가던 70년대였다. 당시에도 도회지에서는 시골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생활용품들이 있었던 듯하다. 물론 책을 통해서 보았듯이 한편에선 전태일 열사 같은 분들의 어려운 삶이 있기도 했다. 단지 어느 계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따지지 않고 그 시대에 존재했었던 것인가 만을 본다면 우리가 모르고 지냈던 생활용품들과 생활양식들이 많지 않았나 싶다. 단지 생활형편 상 구매하거나 이용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서울 역사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을 가보면 70년대 우리 생활상이 대부분 비슷했다. 옴팡집이나 판잣집이 존재했다. 또 석유곤로, 앉은뱅이책상, 어쩌다 중상층들이 사용하는 아파트나 가옥이 나오더라도 연탄 화구를 갖춘 조각 타일의 부엌이 있는 주택의 모습이었다.
그런 서민들의 삶 가운데 내가 지금 기억을 되살려 보고자 하는 것은 어머니의 뜨개옷이다. 털 실로 된 스웨터다. 나 스스로 어머니가 짜신 뜨개옷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다고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기억하는 것은 겨우내 어머니가 안방에 앉아 손뜨개하던 모습이 따뜻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궁이에 장작을 태워 열에너지로 변환되어 얻어지는 따스함과는 다른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