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라고 죽음이 쉬운 것은 아니다.

by 이상훈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존 드라이든은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라고 했다.
여기서 습관이라는 것은 의식의 흐름이나 행동양식, 언어 표현력을 모두 포함하는 것 같다. 연습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극히 공감하는 경구이다.


연습이 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내 것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노인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가십성으로 거론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같은 공간에 모시고 있는 노인들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 정작 조금이라도 아프게 되면 병원을 언제 가느냐, 가야 하지 않겠느냐 한다는 것이다. 즉 죽어야지와 병원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어느 누구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로 죽음이라는 것도 먼 훗날에나 발생할 것처럼 관념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좀 더 구체적으로 개념화하고 내 곁에 두고 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가톨릭 단체 중에 레지오라는 것이 있다. 봉사는 물론이고 상을 당한 가정을 방문해 함께 기도드리고 망자가 하늘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축원하는 일들도 한다. 필자는 30대 시절에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 한 경험이 있는데 당시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은 거의 다니지 않던 장례식장을 월 2~3회 이상 다니다 보니 죽음에 대해 그렇게 낯설지 않게 느끼게 되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는 일은 의외로 담담하게 느끼면서도 자식이나 손주를 자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극렬한 심적 고통을 장기간 겪기도 한다. 이런 경험을 한 분들의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서인지 죽음을 자신으로부터 먼 곳에 위치하도록 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는 인생에서 쉽게 겪지 않은 사건을 겪었기에 비롯된 것이다.


연습에 의해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 외적인 충격에 의해서 신체가 반응을 나타내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부러 강한 외적 충격을 경험하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기에 생활자세에서 연습을 충분히 하고 고뇌함으로써 자신 스스로에게 체화되도록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할 때만이 신체적 진행 단계와 무관하게 삶을 좀 더 관조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생각하기에 나이 드신 분들은 나이가 들었다고 죽음을 용인하거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은 누구나가 같은 것이다. 다만 결정하기 어려운 것 일 수록 좀 더 밸런스 있는 사고로 접근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할 뿐이다.
이를 위해서 틈틈이 깊은 명상과 사유를 해 보는 것 또한 좋은 습관을 길들이기 위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무의식 중에도 좋은 선택과 행동 양식이 보이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