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을 끝낸 들판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by 이상훈


가득했던 것들이 비워지면 해냈다는 행복감이 들까?

가을을 향해 분주히 달리던 것들이 어느새 정점을 향해 치닫고 어느 순간 성과물을 토해내고 나면 무슨 기분이 들까?

만족감이나 성취감 그런 것이 있기는 할까? 그런 기분은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 깊이는 측정이 가능할까? 어느 이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분이라고도 하지만 많은 것이 다르다. 비가 오는 날에도 바람이 부는 날에도 쉼 없이 하루 몇 번씩이고 논둑길을 걷다가 갑자기 발길을 뚝 멈춘 농부의 마음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뿌듯함일까 아니면 조금 더 보살피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한스러움일까?

나는 문득 비워진 논과 뭉개진 논둑 사이에 앙금처럼 가득 쌓인 볏짚과 탑새기를 보면서 농부들은 이 순간을 어떻게 추억할까 생각해 봤다.

비워진 논에 대한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오른다.

어느 해 늦가을 날 마당이 제법 넓었던 이장 댁의 비워진 앞 논에 국방색 군용 트럭이 한가득이다. 국방색으로 멋을 부린 군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긴 줄을 매단 하늘색 스피커를 설치하고 아이보리색의 스크린용 천을 바깥 사랑채 벽에 매달았다.

아마 우리 마을에 영화장비를 싣고 민간인들을 위문하러 온 듯하다.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면 영사기가 돌아가면서 흑백화면 속에 지금은 잊힌 김승호 고은아 최은희 김희갑 김희라 남궁원 남정임 도금봉 독고성 문희 박노식 등 당시 유명짜한 배우들이 초가집 등을 배경 삼아 열연을 펼쳤다. 텔레비전이 동네에 몇 대 없던 시절 군인들이 보여준 이 영화는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던 것 같다. 물론 장날 읍내 나가 서커스단 공연을 보고 대포 한잔 하는 것도 큰 위안이었지만 말이다. 그날 모든 동네 사람들의 귀와 눈은 온통 스크린에 집중되었던 것 같다. 그 집 마당에 한숨이 가라앉고 눈물이 내려앉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그 당시 우리들의 할아버지들은 조그마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라디오만한 사각형의 건전지가 더 눈에 띄었던 그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는 만담으로 유명한 고춘자 장소팔 씨의 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었다.

농기계가 변변치 않았던 그 시절의 농사는 모를 내는 것도 수확을 하는 것도 참 모진 고행과도 같았을 듯싶다. 혹여 가뭄에 벼가 말라죽을까 아님 홍수에 벼가 물에 잠길까 그도 아니면 태풍에 쓰러질까 온종일 논둑길에 서서 깊은 주름에 감춰진 퀭한 눈으로 밀짚모자 하나에 의지한 채 길고 긴 논둑길을 도는 농부가 기억 속으로 소환된다. 농부의 입안은 바짝 말라 입술 주변엔 버캐가 끼고 무릎까지 걷어 올린 바짓단엔 이름 모를 풀씨만 한가득 담겨 있다.

공부를 못하면 농사나 지어야지 하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정말 모르는 거짓뿌렁일 뿐이다. 어쩌면 공부는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지만 농사는 하늘도 함께 해야 하는 일이었기 성취의 규모가 더 크다 할 것이다.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옛말이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 들녘이 가을걷이로 비워졌을 때 느끼는 행복감과 아쉬움은 일상의 소소한 것과는 참 많이 달랐었을 것이다.

비워진 논에서 느끼는 농부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것은 물론 나이 먹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당장은 농사일하는 동안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 준 감사함이나 한 해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다 문득 이런 농사를 내 삶에서 몇 번이나 더하고 떠날까? 안타까움도 있을 수 있겠다.

이렇게 비우려고 그렇게 뜨거운 여름을 보냈나 하기도 하고 결국은 이렇게 비워져야 새로운 준비를 할 수 있겠지. 한 때는 그렇게 채우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한때는 또 이렇게 비우려고 노력을 계속하겠지 아마 이런 번뇌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다.

결론에 유의미하게 도달할 수는 없지만 채우는 동안이 기쁨의 시간인지 수확의 시간이 기쁨의 시간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다. 짧지만 목표로 했던 수확의 기쁨이 가장 클 듯싶기도 하다. 그런데 삶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 비워짐의 안타까움이 더 큰 날도 많다.

지금은 왜인지 가을걷이를 끝낸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논바닥에 딱딱하게 새겨진 농사꾼들의 발자국과 뭉개진 논둑의 가장자리에 가득 채워진 탑새기가 머릿속에 자꾸 떠오른다.

그날 냉기 가득한 바람으로 잔뜩 메말랐던 이장 집 앞마당 논과 그 논에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들어서던 군용 트럭의 위세와 홑바지를 타고 들던 섬뜩함은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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