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멍

by 이상훈

설을 맞아 어머니 자식들이 모처럼 어머니 집에 모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설에 어머니 댁에서 못해온 터여서 온 가족이 이렇게 모인 것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올해 연세가 88세로 미수를 맞으신 어머니를 이렇게라도 찾아뵐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기도 하고요. 명절 지나면 부부간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한다고 하는데 다 이유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해보다 이른 아침 설 차례 상 올리기를 마치고 아이 엄마가 준비한 음식들을 싣고 본가로 향했습니다.

설 인근 날부터 매스컴에서는 설당일 교통정체가 최고조에 이를 것이라거나 한파와 눈 예보를 잇달아 있음을 알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설 당일의 교통량은 부담스럽지 않아 평소의 명절보다 정체가 심하지 않았고 날씨도 그다지 춥지 않았습니다.

본가에 들르기 전 장인 장모가 모셔져 있는 공원묘지에 들러 제를 올렸습니다. 날이 추워서인지 공원묘지의 주차장은 대체로 한산한 편이었습니다. 공원묘지 앞 구멍가게에는 성묘에 쓰일 물품과 조화 등을 사기 위해 많은 이들이 줄을 서있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혐오시설로 여겨지는 공원묘지가 들어섬으로 많은 어려움도 있었겠으나 공원 묘가 적정 기를 넘어서니 경제적으로 많은 보탬이 되는 모양이어서 참 아이러니한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 댁에 도착해 보니 남동생 네가 미리와 어머니와 아침 식사를 같이 한 상태였고 연이어 여동생 네가 조카와 함께 점심 무렵 도착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요. 어머니는 그동안 대화할 상대가 없으셨다가 이렇게 모이게 되니 즐거운 가 봅니다. 더구나 딸아이가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을 앞둔 상태여서 할 이야기가 더 많은 상황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제수씨도 그렇고 집안 여자분들은 모두 허리와 어깨가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특히 제수씨는 학교에서 장애아들을 돌보다 허리를 다쳐 일어서기도 앉기도 참 많이 불편해 보였지요.

설이 반갑기도 하지만 집안마다 특수한 사정들이 많기도 해 안타까움도 크지요. 어쩌면 가정마다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으로 행사가 이루어지기에 서로서로 챙겨주는 따뜻함이 없으면 명절을 나기가 고단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님 네 가족을 제외한 3 가족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예전 제가 어릴 적 설날 이후 대보름날까지 들판에서 불놀이했던 이야기를 펼치니 여동생 남편인 매제가 자기 집에서 불 멍을 한 번 보자 합니다. 제가 예전 글에도 자주 언급한 바 있는데 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들과 어울려 먼 들판의 마을 경계까지 나아가 짚단에 불을 놓고 옆 동네 아이들에게 함성을 지르며 불 싸움 혹은 불놀이를 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 일처럼 떠오릅니다. 50년이 다되어 가는 일이었지요. 수확이 끝난 들판은 멀리서 보면 평평해 보이지만 실제로 들판을 걷다 보면 가을걷이하느라 들판 곳곳이 농군들의 발자국과 마차 바퀴 등으로 패어 있고 벼 밑동도 일정한 간격으로 벼 수확 후 그대로 남아 있어 보행에 지장을 주었답니다. 아마 들판을 걸어 본 모든 이들은 아니었겠지만 수확이 끝난 예전 논바닥에서 뛰어 보면 80~90%의 사람들은 넘어지거나 발목이 겹질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눈이 쌓이면 그런 일은 덜하지만 말이지요. 눈이 온 날은 대신 발목까지 눈에 잠기기 때문에 사계절 신었던 운동화 안으로 눈이 들어가 양말이 젖는 것 명약관화한 일이지요. 눈 속에 빠지는 것을 감안해 장화를 신는 경우도 있으나 예전에는 털 장화를 갖춘 집이 많지 않아 고무장화를 많이 신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보온성이 없어 발이 무척 시려 발끝이 상상을 초월하게 아팠습니다. 어쨌든 젖은 운동화와 양말을 짚단에 불을 놓아 말리기도 하지만 쉽게 마르지는 않고 불에 더 가까이 다가가 쪼이다가는 나일론 양말에 구멍을 내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불에 쪼이다 보면 옷과 몸은 불 냄새로 가득하고 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매타작을 당했을 듯싶어요. 이해도 되는 게 당시에는 세탁기가 없어서 가마솥에 물을 데워 차가운 수돗물과 섞어서 빨래를 했고, 더운물의 양이 많지 않아 헹굼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상수도 놓이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샘에 가서 찬물로 떠다 빨래를 하는 경우도 많아서 겨울철 빨래는 정말 힘든 고역이었습니다. 마당 빨래 줄에 넌 빨래는 동태같이 굳어서 잘 펴지지 않았기에 저녁이 되면 동태처럼 굳은 옷들을 집안에 들여놓습니다. 이런 작업을 며칠에 걸쳐 겨우 건조가 되니 아이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 멍을 한지 어느새 한 시간 이상 훌쩍 지나 사위가 캄캄합니다. 집안으로 들어와 구운 치즈에 와인 한잔을 하다 몸과 머리칼에 밴 불 냄새로 다시 어린 시절을 추억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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