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 컴퓨터 안에 저장된 글 하나를 클릭했는데 단 몇 줄 쓰다가 만 글쪽지가 보인다.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태풍이 올라오면서 사무실이 위치한 용산도 아침시간을 지나면서 비를 뿌려댔다. 아마도 내가 초창기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을 그리는 것 같았다.
그 당신 용산역은 지금과 같이 현대화되어 있지 않고 휴가를 나온 군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들이 많다. 1층 입구 옆으로도 2층에도 TMO라 글자가 큼지막하게 내걸려 있기도 했고, 용사의 집을 비롯해 군 관련 시설들이 곳곳에 분포해 있었다. 용산역사 건물은 노란색 페인트 아니 약간은 핑크 빛을 띤 듯하기도 하고 주황빛을 띠기도 했던 듯싶은 콘크리트철골 구조의 2층 건물이었다. 지금의 현대식 건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때도 용산철도 부지를 가로질러 전자상가 쪽과 연결되는 지붕이 덮인 구름다리가 있었다. 용산 역에서 내린 많은 이들이 전자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이 다리를 통해 전자상가로 이동했기에 늘 사람들로 붐볐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90년대에는 추석 설 귀성표를 구하기 위해 예매일자가 발표되면 광장이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나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 통로를 이용해 용산전자상가나 선인상가 등으로 조사를 나가기도 했었다. 용산역 옆에는 철도 관련 회사들과 군인 관련 시설물들이 더 있었는데 주로 출장 나온 영관급이상들이 사용하는 용사의 집이 있어 숙식을 제공했다. 식당은 일반인 등에도 개방을 해 퇴역군인들로 보이는 어르신과 이웃 주민들로 항상 만원을 이뤘다. 나도 가끔 동료들과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를 사 먹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면 용산역 광장에서 간이 판매대를 설치하고 농산물이나 의류 등을 싸게 파는 때도 있어 식사 후에 한 바퀴 구경삼아 돌기도 했다. 인근에는 석쇠불고기로 유명한 역전식당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홍등가도 밤늦게까지 불을 밝혔었다.
수원갈비, 역전식당 그리고 태림이나 북경원 같은 식당 이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너무 자주 이용해서였을까? 음식 맛이 좋아서였을까? 알아야 할 필요성은 없지만 궁금은 하다. 맛이 좋은 집은 가격도 비싸 사무실에서 회식할 때나 가끔 맛을 본 정도다. 그중 하나가 아마도 태림이었지 싶다. 한우 숯불고기를 판매하던 집이었는데 임·단협이 타결되면 가끔 회사 측 대표들과 자주 들렀던 기억이 있다. 수원갈비는 물론 수원에 있는 수원 왕갈비의 서울지점이라 할 수 있다. 용산 중대병원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는 테이블 세팅과 제공되는 찬류가 고급스러웠었다는 생각이 든다. 북경원은 용산 시외버스터미널과 나란히 하고 있는 육교 바로 옆에 있었는데 2층 구조물로 저녁에 고량주를 곁들인 맛이 좋았다. 다방도 참 많았는데 당연히 용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 그 옆에 있던 육교를 좌우로 해서 여러 가지 이름의 다방들이 있었다. 용산시외버스터미널이 양재동 쪽으로 이전한 후에는 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해 새벽차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이용했던 많은 쪽방촌들이 백반집으로 바뀌어 한동안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서넛이면 가득 차는 좁은 방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롭게 준비하는 식 재료라서 인지 백반이라는 단일 메뉴임에도 맛과 가격이 참으로 훌륭했다. 90년대에 많았던 것이 꼬치구이류와 어묵탕류를 주로 팔던 투다리 선술집이다. 용산역 남쪽으로 해서 한강대교 북단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만도 4~5개의 점포가 있었다. 점포와 점포 사이에 거리 제한 같은 것이 있는 때여서 이래도 되나 할 정도로 번성했던 시절이다. 투다리에서 알게 된 술이 하나 있다. 백화양조에 출시한 청하라는 술이다. 정종과 맛이 비슷한데 차게 해서 마시면 정말 몇 병이고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맛이 부드럽다. 다만 술이기에 아마 알코올도수가 10%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에는 취해서 일어설 수가 없는 술이다.
주춤했던 비가 다시 내린다.
가을 수확기의 비는 농작물에 백해무익인데 말이다. 그 비로 오늘 아침은 더 쌀쌀한 느낌이고 금요일을 맞아 도로마다 차들이 엉켜 답답함을 더해 준다. 살짝 흩뿌리던 비가 제법 굵기를 더해 간다.
90년대 초엔 사무용 컴퓨터의 보급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지금에야 편집용 프로그램이 널리 개발 보급되고 사진작업도 컴퓨터 상에도 간편하게 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사진에 글자를 넣기 위해서는 조판실 전문가에 의해 여러 차례의 필름작업을 거쳐야 했다. 필름을 확대해서 찍고 “구구리”를 넣고 “복가시”를 입히고 참 많은 수작을 필요로 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이후 매킨토시 등 컴퓨터 보급의 확대와 포토 샾, 일러스트, 쿽엑스프레스 등 급속한 편집용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컴퓨터에서 바로 PS판에 찍을 필름을 출력하거나 바로 인쇄기에 걸 수 있는 PS판을 곧바로 출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공정을 담당했던 많은 분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11포인트인가 하는 글자 크기로 11자가량을 한단으로 해서 총 15단으로 되어 있는 신문 대지에 편집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크기의 작업용 책상이 필요했다. 15단으로 되어 있는 편집용 대지는 편집하기 편하도록 글자크기와 같은 크기의 사각형이 15단으로 일정하게 찍혀있다. 파란색이나 초록색은 필름작업 시 필름에 자국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chromakey와 같다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지작업은 편집자가 위치와 구성을 이야기하고 초보자가 편집용 커터 칼로 사식원고를 잘라 3M에서 출시한 스프레이형 접착제로 붙이면 된다. 그때는 그래서 딱풀도 참 많이 사용했다. 편집자는 기사에서 정말 남과 다르게 기상천외한 문장을 뽑아내는 것이 일이었다. 매일매일 비슷한 문장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다 보니 좀 더 돋보이는 단어를 찾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것이 편집기자의 일이었다. 매번 신문을 보면 같은 구성 같지만 조금이라도 다르게 구성하려고 노력한다. 그중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말 헤드라인을 어떻게 뽑을 것인지 글자 수는 맞는지, 임팩트는 있는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장인지, 기사 내용과는 부합을 하는지를 두고 머리가 뽑히도록 고민을 한다.
편집스타일도 2000년대를 기준으로 많이 바뀐다. 활자를 조판하던 시대는 당연히 한자를 중심으로 한 종조가 대세였는데 이러한 기류는 한겨레 신문이 등장하기 전까지 완전한 대세였다. 한겨레의 횡조 편집은 한글세대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사회 중심세력이 한글세대로 바뀌면서 국내 유력 일간지들도 횡조 편집에 가세했다. 이 부분은 전산편집의 보현화와는 관계가 적다. 전산용 컴퓨터로 사식을 치던 시대에도 우리 신문들은 상당기간 종조기사를 유지했다. 횡조 편집이 일반화되면서 제목도 기사면 전체에서 횡으로 뽑아 쓰는 것이 보편화됐다. 종조 편집의 경우에도 횡으로 헤드라인을 혹은 중톱의 제목을 뽑아 쓰는 경우도 물론 있었다. 횡으로 제목을 뽑아 쓰면 잡지 헤드라인과 같이 글자 수의 영향은 많이 줄었다. 종조로 할 때 한 행의 글자 수는 스트레이트기사가 11자였고, 사설이나 박스 형 기사의 경우에는 15자까지 늘려서 지면구성의 미적인 부분을 고민했다. 전산 사식팀에 페이지와 넘버링이 매겨진 원고를 넘겨 전산사식을 요청한 후, 박스기사의 위치나 헤드라인을 횡으로 할지 종으로 할지 혹은 좌톱기사 나 중톱기사를 무엇으로 할지 혹은 행간을 얼마 정도로 잡을지 등을 놓고 고민을 많이 한다. 기사가 부족하면 부제목이나 설명제목으로 채워 나가는데 제일 쉬운 것은 사진을 적절히 이용하는 게 독자들에게 읽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기사를 효과적으로 이해를 시키데도 도움이 됐다. 또 하나 기사 량이 넘치면 뒷줄부터 커트하는데 이럴 경우 미괄식 양괄식 병렬식의 기사는 참 할 말이 없다. 중요 내용이 잘려나갔다고 애걸해 봐야 소용이 없다. 반드시 중요한 것은 리딩문장에 담아라 해도 병렬식으로 구구절절이 소개하는 기사도 많았다. 그래서 편집회의 때마다 중요한 내용들은 앞쪽에 배치하고 뒤쪽에 부연 설명을 추가하도록 요청하지만 마냥 잘 되는 것도 아니었다.
편집실이나 취재실 환경도 요즘과 많이 다르다. 여름에는 대형 스탠드 선풍기가 군데군데 서있었고, 에어컨의 바람은 미약했다. 책상마다 신문스크랩용 파일과 취재자료 그리고 사진 나부랭이와 출입구 옆에는 출입처와 스케줄을 기록하는 칠판이 있다. 지난 8월에 개봉된 하정우, 주지훈 주연의 영화 비공식 작전에 등장하는 외교부사무실의 모습과 같이 철재 책상은 창문 쪽 혹은 사무실 가운데에 그리고 창문이 없는 벽과 출입문 옆으로는 철재 서류함과 캐비닛 등이 일렬로 혹은 군데군데 업무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놓여 있다. 책상 위에는 재떨이도 놓여있고 그 옆에는 회사로고가 박혀 있는 빈 원고가 한 뭉치씩 이리저리 무심하게 널브러져 있다. 그 친구는 옥상으로 담배를 피우러 간 것인지 구겨진 원고지들이 책상 위와 쓰레기통 옆으로 수북하다.
그 한구석이 편집부다.
보조용 접수 책상에서는 원고접수용 서류가 놓여있다. 서류에는 기사제목(가제), 취재기자명, 원고제출날짜가 지난 편집회의에서 논의된 기사 면에 맞게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편집부 최고참인 차장 책상을 맨 앞쪽으로 놓고 그 책상 아래로 두 개의 책상이 더 있는데 연공서열 순으로 배치된다. 업무용 책상 바로 옆으로 넓은 대지작업용의 책상이 있고 전등스탠드가 책상마다 놓여 있다. 당시엔 정말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아 온전히 필기구와 종이만으로 업무가 이루어졌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탕비실일까? 요즘에야 탕비실에 전자레인지가 하나씩 있지만 예전에는 커피와 차 종류 그리고 컵, 그리고 커피포트만 있었다. 여직원들은 특별한 휴게공간이 없어서 보통은 탕비실에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었다. 편집부서의 경우에는 그나마 특수시설인 사식실이나 사진현상을 위한 암실이 있어서 보통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듯싶다.
그 당시 편집회의가 열리면 옆 건물 다방 아가씨가 빈 커피 잔과 보온병 그리고 설탕과 프림이 들어 있는 병을 담은 쟁반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올라온다. 5층까지 오려면 참 힘들었을 텐데 항상 웃는 얼굴이다.
손님을 만나기 위해 다방에 갈 때마다 마주친 아가씨여서 그런지 오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로 낯부끄럽게 아는 척을 했다. 물론 나하고만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아가씨도 나이 드신 분 보다 자기와 비슷한 나에게 말을 거는 게 덜 쑥스러울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