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심

by 이상훈


추수가 끝난 논바닥

가끔 오늘과 같이 바람이 휑하고 지나면

축축한 땅과 그루터기엔 냉기만 가득했다.

늦가을 날은 맑지만 간혹 비가 내려

수확을 앞둔 이들의 마음을 훑어 내렸다.

그래서 가을의 비는 아무 쓸모없는 것들이라 했다.

여름철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던 것들이

비와 늦가을의 냉기로 허물어져 버리기에 말이다.

그날도

검은빛의 대지에 비가 내렸다.

그날

그 사람 안에도

그 땅 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김장을 얼마간 앞둔 아침부터

탈곡기 진동이 천지를 흔든다.

바심하는 곳과 잇닿은 곳은 어디나

탑새기와 검불이 가득하다.

발동기 돌아가는 소리를 타고

멀리까지 탑새기가 날린다.

배춧잎 위에도

무 잎 위에도

당근 잎 위에도

갓 잎 위에도

탑새기가 두껍다.

그래도 땅 주인만큼의

무게는 아니다.

저녁을 먹고 고단한 몸을 눕히기도 전에

마음 급한 논 주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그 시절엔 낫이 지나고 밑단이 베어져 누워져 있는 볏단 위로도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기도 했다.

허리가 끊어져라 벼를 베고 또 베어도 그 끝은 아직도 먼 곳에 있었다.

그날 냉기만큼이나 일꾼들의 마음도 오그라져 긴 담배 연기만큼 호흡을 뱉어내야 했다.

어느덧 눈썹 미간에도 하얀 이슬이 붙고 굳어진 손가락은 볏단 하나에도 부서질 듯하다.

상강을 지나면서는 어둠의 속도는 빠르게 창문 앞에 와 있었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그 많던 탑새기는

김장철이 오기 전에 사라졌다.

그렇게 고단한 시간들이

모두에게 약이 되었다

보내야 할 것들은 보내고

이제는 암시렁도 안 한 듯 말이다.

탑새기는 그저 탑새기의 역할을

인간은 그저 자기의 본능대로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바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