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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는 동료를 통해 기억해 본 것들

by 이상훈

지난번 편에 이어 글을 써본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정년을 맞이한 분과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 때문이다. 그분도 내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참으로 모진 세태를 겪으셨다.

경기 북부 의정부에 위치한 2인 근무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했고, 회사 내 전화 교환실에서도 근무했다.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은 결과였고, 그들 눈에는 그저 ‘제발 퇴사해 주었으면’ 하는 시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다 내가 회원 관리를 담당하는 영업부에서 일할 때 다시 인연이 닿았다. 아마 2005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2005년은 1990년대에 비해 회사가 눈부신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사무용 책상과 집기류가 모두 최신형으로 바뀐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1990년대의 추억이 많으므로, 그 시기를 좀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물론 살면서 타인을 비난하고,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고 움츠러들기도 했으며, 우쭐거렸던 적도 있다. 하지만 삶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나면 모두 부질없었던 것 같다.


1990년대 신문 편집을 할 때면 사진기자와 편집 기자는 꼭 함께 움직여야 했다. 기사의 성격에 맞는 사진과 서체, 크기 등은 내가 의도한 제목과 글자 수 등과 잘 어울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급조된 신문이 많아 편집을 디자인이라고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디자인 전문 인력이 있는 신문사도 있었지만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프 제작 또한 편집 기자의 몫이어서, 처음부터 편집 레이아웃에서 제외되던가 스스로 그래프를 만들어야 했다. 그때 필요했던 것은 약물이 새겨진 시트지, 트레이싱지, 로터링 펜 등이었다. 지금은 편집 관련 업무가 모두 컴퓨터로 이루어진다. 일반인들이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일을 처리하듯이 말이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볼 것 같았는데 정년이다.

당시 신문 편집국 국장이나 부장실에는 손님맞이용 소파가 있었고, 옆에 협탁도 있었다. 협탁 유리판 아래에는 초록색 부직포가 깔려 있었고, 그 아래에 조직도와 임직원 전화번호를 넣어 두었다. 여직원들이 커피를 내오는 풍경도 일상적이었고, 인근 다방에서 주문해 마시기도 드물지 않았다.

‘지나면 다 추억이라더니, 힘들었어도 그때가 좋았다’는 말이 떠오른다.


직장 생활 초기에는 용산 터미널 맞은편에서 관악구 신림동 상업은행 입구까지 95번 버스나 55-2번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경사로를 지나 산 중턱 약수터까지 등산하듯 올라야 자취방에 닿았다. 어느 날은 주머니에 버스토큰이 하나만 남아 아찔했던 기억도 있다.

어느 날 마포 공덕시장에서 막걸리를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공덕동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가 끊겨 영등포나 서울역 방면 버스를 타야 했다. 한참을 걸어 95번이나 55-2번 버스로 옮겨 타야 했는데, 버스토큰이 하나밖에 남지 않아 애태웠다. 막차를 놓치면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남에게 의지하는 삶은 늘 외롭고 바람에 휘청인다.


입사 후 6개월쯤 지나 영등포에 사시는 당숙의 소개로 영등포 1동 OB맥주 공장 인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십만 원 정도였는데, 방 하나가 겨우 누울 수 있는 크기였다. 새벽 전철 소리에 깨기도 했고, 늦게 귀가하면 연탄불이 꺼져 있기도 했다. 방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신 것은 근처에 사시던 고모 덕분이었다. 살림도구를 마련해 주시고, 가끔 고기집에 불러 맛있게 사 주셨다. 나에게 잘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매일 야근하느라 좁은 방이 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에는 같은 건물 중식집에서 끼니를 해결했고, 가끔 데이트를 하거나 영등포 구청 쪽에 사는 친구 집을 찾아가 시간을 보냈다. 일본에서 유학 온 친구도 만나 일본어 학원을 다녀보고, 나 자신에게도 투자를 좀 해 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내 삶 속에 진정한 내가 없으니 자주 위축되었고, 특히 과음 후 토하고 난 다음 날의 나는 더욱 비참했다. 술자리에서의 만용도 후회했고, 이런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후회했다.


‘만남이 반드시 친근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운 시기였다.


20대 중후반이 되자 결혼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함을 보내고 밤새 술을 마시며, 숙취에 절어 다시 잠들 때까지 누워 있던 날도 많았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3차, 4차를 거친 술자리는 자칫하다 목숨을 잃을 뻔했을지도 모른다. 젊은 혈기에 주먹이 오가기도 하고, 치킨집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때 전차에 올라 감전으로 돌아간 사우도 있었다. 불안한 심리와 불확실한 미래가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취직을 해도 방황이었고, 취직하지 못해도 방황이었다. 불안한 심리를 만남으로 극복하려 했지만, 내면이 성숙하지 않으면 어떤 것에도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지만, 그조차 외부의 도움으로 극복하려 한 것이니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라 생각했던 이들도, 대부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지인에 불과했다.


90년대 초에는 민주화 열기로 노동조합 결성이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우리 회사에서도 사측과 조합 간 갈등이 고조되었고, 사측의 사주를 받은 중간 간부들의 압박이 개별적·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몽둥이를 든 체격 좋은 직원들이 시위에 나서기도 했고, 회사 벽면에 대자보가 붙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나는 유독 친구도 없었기에 따돌림을 당할까 두려워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다. 친구들의 결혼식과 돌잔치에도 자주 갔으나, 결국 그날뿐이었다. 젊은 시절 친구 몇몇은 의리와 도덕을 강조하며 모임 참석을 강요하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직원 단속을 위해 야외 단합 대회를 열었고, 서로를 격려하며 대오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독려했다. 대자보를 쓰고 나면 퇴근길에 술이 빠지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너무 주변에 끌려 다녔던 것 같다. 애써 우정을 쌓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진정한 인연은 헤어질 인연이면 헤어지고, 만날 인연이면 세월이 흘러도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을 알면서도 허상에 사로잡혀 집착하던 것은 아마도 호르몬 탓이었을 것이다.

어떤 삶이든 관통하는 것은 세월이 약이라는 것이다. 누구의 인생에도 후회와 아픔은 있지만, 그것으로 사람이 규정되지는 않는다. 자신을 만드는 것은 말씨와 행동 습관, 에티켓 등이 아닐까?

자신의 삶에도 후회와 아픔이 있는데, 타인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일에는 과장된 반응을 보인다면, 삶을 유지하고 사회적 관계를 평온하게 이어가기가 어렵다.

그 시절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금도 특별할 것은 없다. 다만 누군가의 ‘아빠’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입사 초기에 임원들에게 인사를 다니던 중, 지금은 돌아가신 모 임원이 노동조합 이야기를 언급하며 좋지 않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내 부서 대부분이 조합원이었고, 그 선배 간부에게 임원의 말을 전하자 바로 항의가 들어왔다. 임원은 나를 불러 ‘직장생활을 똑바로 하라’고 꾸짖었다. 그 이후 한동안 그 선배와 말도 섞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인간성과 예의에만 집착해 있었다.


밝음이 계속되면 건조해 말라 죽듯이, 너무 도덕적이면 세상 모든 것이 속물처럼 배타적으로 느껴진다.


부서마다 다양한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매일 직원들을 감시하며 대표에게 보고하고, 관련 일지를 꼼꼼히 작성해 두기도 했다. 나중에 그 일지 사본을 본 적이 있는데, 조합원 A가 누구와 몇 시에 어디서 만났다는 내용이 빼곡했다. 그 사람은 ‘밤안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회생활은 정형화된 틀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요령과 타당성을 내세우되 내부에서는 융통성 있게 운용해야 할 때가 많다. 당사자일 때와 제3자 관점일 때가 다르므로, 때에 따라 경험 있는 사람처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경험 없는 사회 초년생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든 도덕적 흠결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에게는 엉뚱하게 비칠 수 있다. 사람은 각자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스스로 도덕성을 입증하려 한다.

개인적으로 그 시절은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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