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어린 시절의 공간

by 이상훈

봄이 지나고 모내기 철이 되기 전까지 들판은 아이들에게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준다.
공간이라고 표현하니 시간에 반비례해서 나의 어린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듯하고 어느 순간엔 도달해 버릴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시골 아이들에겐 집 안팎의 모든 것이 놀이시설이 될 수 있고 많은 자연적인 물건들도 놀이의 도구로 활용될 수도 있지만 들판과 같이 넓은 공간을 가져보기란 쉽지 않다.
멀리 떨어진 학교 운동장이 그나마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학교가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설사 아이가 사는 집이 학교 옆이라 하더라도 고학년 형과 언니들이 차지하고 있는 운동장은 어린아이가 맘대로 들어가 놀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시각적으로 들판이 탁 트인 공간이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지만 시골이라고 해서 한창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육체적으로 성장할 기회가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60~70년대 보통의 시골 아이들은 주로 몇 평 되지 않는 울타리 옆 그늘 진 곳이나 사랑채 마루 등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금파리로 땅따먹기 놀이나 남자아이들의 경우에는 딱지놀이를 많이 했다.
땅따먹기 놀이는 게임에 참여하는 인원수 등을 고려하여 게임 판이되는 적당히 둥그렇게 그려 놓은 땅바닥 위에서 하는 놀이이다. 팀이나 개인별로 다양하게 할 수가 있고, 2팀 이상만 되면 가능하다. 가위 바위 보 등으로 진행 순서를 정한 다음 선 순위 진행자가 알맞은 크기의 사금파리를 땅바닥의 둥그런 게임 라인 가장자리에 놓고 컨트롤이 가능한 거리만큼 손가락으로 쳐서 사금파리를 이동시킨 다음 정해진 횟수 안에 사금파리를 자기 영토로 안으로 불러들이면 되는 게임이다. 자기 영역이나 라인에 접근을 못하거나 지나치면 아웃된다.
딱지는 재개발 딱지 이런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방구에서 파는 것으로 가로*세로가 30cm*50cm 정도 되는 사각형 아트지에 커팅기로 떼기 쉽게 지름이 6~7cm인 그림 등이 그려진 원형 모양의 종이다. 동그란 원 안에는 아톰이나 마징가 Z 등의 만화 영화 주인공의 활동 장면이 그려져 있고 원형 테두리에는 딱지마다 다른 수의 별들이 빼곡히 박혀 있다. 게임은 공격과 수비 개념으로 나누고 수비 팀이 양손에 각각 일정량의 딱지를 쥐면 공격 팀이 일정량의 딱지를 별의 숫자가 많거나 딱지의 숫자가 많은 손에 베팅하고 정한 규칙을 맞추면 베팅한 숫자의 딱지만큼 상대의 딱지를 가져오는 게임이다.
어쨌든 공간이 없어도 이런 게임을 할 수 있지만 들판이라는 비어 있는 공간이 생기면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적인 놀이를 창조해냈다.

공간 이외에도 놀이에서 중요한 것이 있는데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의 수이다. 동네는 학교와 다르게 학생의 수가 많이 모자라 축구라도 하려면 강아지를 데려다 골키퍼라도 시켜야 할 정도다. 그렇기에 공을 잘 차든 못 차든 형 동생 할 것 없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게임 참여해야 했다.

봄이 온 들판은 잔디밭처럼 온통 초록의 론 그라운드로 탈바꿈한다. 풀밭으로 변해 있기에 넘어져도 부상의 염려가 적다. 아이들은 그렇게 4월이 지나 모내기철이 오기 전까지 들판에서 맘 놓고 야구나 축구를 한다. 빈 들판은 아이들에게 황홀한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푸른 들판은 저녁이 되면 전쟁 놀이터로 변하기도 한다. 풀 속에 엎드려 전쟁놀이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보면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밥 먹으라는 엄마 소리에 아이들은 하나 둘 집으로 사라져 갔다.

아름답고 재미있었을 것만 같은 이 놀이도 음양의 조화만큼 자연스럽게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집에 돌아온 아이의 옷은 온통 풀물이 가득 배어있고 또 다른 일거리를 마주한 어머니들의 잔소리와 매질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집집마다 울려 퍼지기도 했다.

전 날 저녁의 우는 소리를 생각하면 들판이 텅 비어 있을 듯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들판은 어젯밤의 잔소리와 매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의 함성과 뜀박질로 또다시 가득 차 버린다.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닦고 마주 앉은 밥상 위엔 어린 마늘 순을 넣고 끓인 우렁된장찌개가 놓여 있다. 낮 동안 그리 열심히 놀았기에 맛도 좋았겠지만 풋마늘 향과 우렁의 특유의 향이 입안 가득 침을 고이게 한다.
쌀뜬 물에 된장과 약간의 고추장을 넣어 끓인 것인데 아마도 당시에 유행하던 조미료인 “미원”이 들어갔지 않나 싶다. 당시 미원은 요즘 만능 요리사 역할을 하는 라면 수프와 같았다.

뚝배기 된장찌개는 당시 석유곤로나 아궁이의 잔불을 이용해서 끓였다. 아궁이 잔불 속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뚝배기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코끝을 맴도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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