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an Scott, <The Politics of the Veil>
유럽의 무슬림 이슈와 관련된 뉴스를 자주 접하신 분들이라면 “히잡” 착용 금지를 둘러싼 논쟁을 잘 기억하실 겁니다. 영어로는 Headscarves 또는 veils로 번역되는 이 히잡은 무슬림 여성들이 실외로 외출할 때 머리를 가리는 용도로 쓰는 것을 의미하지요. 공공장소에서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 착용을 허락해야 하느냐의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2000년대 후반부터 유럽 각국, 특히 프랑스를 휩쓴 중요한 정치적/종교적 논쟁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프랑스였을까요? 이 문제에 대하여 근대 프랑스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의 역사가 조앤 스콧Joan Scott이 2007년에 쓴 <The Politics of the Veil>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7)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조앤 스콧은 역사적 분석에서 젠더Gender(젠더는 이제 사실상 번역어 대신 원어로 그대로 통용되는 학술언어가 된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생물학적인 성을 의미하는 Sex와 달리 젠더는 문화적으로 인식되고 구축된 성(담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죠)가 어떻게 유용한 분석틀이 될 수 있는지를 역설한 1986년의 논문 “Gender: A Useful Category of Historical Analysis”로 유명합니다. 이 논문은 출간된 이래 거의 “고전급” 위치를 점하는 논문이 되었는데요, 특히 미국 대학 역사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 방법론 수업이나 여성사 수업이 있다면 리딩 리스트에서 이 논문을 못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이지요. 이 논문의 가장 큰 의의는 “젠더는 성에 관하여 인식된 차이에 기반한 사회적관계와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주요한 방식”이며, 따라서 역사연구의 중요한 분석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스콧은 그 동안 역사연구에서 정치, 전쟁, 외교 등 - 이른바 여성이 주도적 위치가 아니라고 여겨졌던 - 분야에서도 정치적 권력의 작동과정에서 젠더가 항상 연관된다고 보았습니다. 즉 젠더와 여성은 정치/정치사의 대립항이 아니라는 점을 규명한 것이죠. 서구의 역사연구에서 젠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단순히 “여성도 이러이러한 기여를 했다”식에서 그치는 연구가 아니라 중대한 정치적 변동과 젠더가 밀접한 상호작용을 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연구들이 등장할 수 있게된 데에는 스콧의 논문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 속 젠더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연구해 온 스콧은 <The Politics of the Veil>에서도 최근의 히잡 논쟁에서 어떻게 젠더와 정치가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서구사회에서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은 소수이며, 대부분의 무슬림 여성은 서구사회에 동화된 상태로 그들이 사는 사회의 의복을 착용합니다. 또한 히잡만이 무슬림의 “종교성”을 드러내는 상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히잡만이 무슬림의 종교적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취급받지요. 예를 들어 무슬림 남성들의 턱수염, 무슬림 신자들의 기도 관행과 식습관 등은 히잡만큼 사회에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또한 법적으로 제재를 받지도 않습니다. 스콧은 히잡이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히잡 금지 법령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논거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왜 젠더불평등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유럽 내 무슬림 사회의 법이나 규정에 대해서는 아무 제재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냐는 반론을 제기하지요. 스콧은 히잡만이 무슬림 사회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유럽 내에서 무슬림에 대한 정치적 편견에 젠더 불평등이 겹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스콧은 “단일한” 무슬림 문화라는 것은 없으며 오히려 최근의 연구들은 히잡이 근대 사회에서 종교적 정체성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근대적 문화를 흡수하려는 이슬람 사회의 노력을 보여준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무슬림 문화를 단일하고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히잡 금지 법령을 밀어불였던 것일까요? 스콧은 그 배경에는 “프랑스 공화국 신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스콧의 통찰이 돋보이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부터입니다. 프랑스는 프랑스인은 모두 “하나의 공화국”을 이루는 프랑스 시민이라고 주장하는, “공동체주의” (communautarisme)와 “보편주의”를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주의와 보편주의가 사실상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묵인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스콧은 프랑스의 공동체주의와 미국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을 비교하는데요,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개별 시민의 사회적∙민족적∙종교적 정체성 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지지하는 방식이라면, 프랑스의 공동체주의와 보편주의는 그러한 정체성들이 공화국의 통합에 방해가 되는 요소이며, “우리는 모두 다같은 ‘프랑스 시민’”이라는 점을 표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미국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African-American) 또는 한국계 미국인 (Korean-American)이라는 식의 인종적/민족적 유산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호칭이 통용되지만, 프랑스에서 "한국계 프랑스인" (coréen(e) français(e))이라는 명칭은 쓰이지 않습니다. 프랑스인은 프랑스 문화, 프랑스어, 프랑스 역사를 공유하는 다같은 프랑스인이지 그 앞에 어떠한 민족적, 인종적 특수성을 보여주는 표지는 프랑스 공화국의 통합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여기까지만 보면 프랑스의 공동체주의가 어떠한 민족적/인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법 앞에 평등한 프랑스 시민임을 인정하는, 다문화주의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스콧은 역사적으로 그 법 앞의 평등이라는 것은 규범 자체로만 존재했을 뿐, 실제로는 프랑스의 공동체주의와 보편주의가 “프랑스 공화국으로의 동화”를 내세워 구성원 간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기능했다고 지적합니다. 이 점은 바로 프랑스가 미국과 달리 국가 인구조사에서 어떠한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도 묻거나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지요. 또한 프랑스의 세속주의라고 할 수 있는 "라이시테" (laïcité)에 대한 집착도 그 점을 잘 보여줍니다. 라이시테라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절대적 규범으로 자리잡은 정교분리의 가치를 나타내는 말로 종교는 반드시 “사적인 문제”가 되어야 하며 공적 공간에서는 절대로 “눈에 띄는 방식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죠. 프랑스 공화국의 공적인 공간에서 프랑스 시민은 모든 종교적 견해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겁니다. (흥미롭게도 미국의 정교분리라는 것은 건국 초기 유럽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온 이민자들의 경험을 보여주듯이, 종교 자체를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었죠) 유럽 사회, 특히 프랑스 정치와 사회는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지배적인 영향력 밑에 있었고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공적영역에서 가톨릭교회를 점진적으로 추방시켰다는 점은, 근대 프랑스 공화국과 라이시테의 밀접한 관계를 더욱 잘 보여주죠. 바로 이러한 공화국과 세속주의에 대한 신성화는 히잡 착용자들을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화국과 세속주의보다 더 위에 놓는 사람들”로 여기게 만듭니다. 히잡 착용자들은"신성한 공화국의 가치"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하는 사람들로 간주된 것이죠.
히잡과 무슬림이 이런 방식으로 규정된 이후부터는 단순하고 악의적인 이분법이 난무하게 됩니다. 프랑스 공화국 - 무슬림 문화를 병치시킨 뒤, “선-악, 문명 대 야만, 우리 대 그들(타자)”이라는 방식으로 말이죠. 히잡 금지 법안이 프랑스 사회에서 논쟁의 핵으로 부상한 이후부터 프랑스의 극우 세력은 바로 저 구도를 자신들의 정치적 선동에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스콧은 히잡 금지 법안이 무슬림을 프랑스 사회로 동화시키는 데 궁극적으로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무슬림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에서는 히잡을 벗어놨다가 방과 후에 다시 착용한다는 것이죠. 결국 스콧이 이야기하듯이, 히잡 금지 법안은 공화주의적 보편주의(republican universalism)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똑같은 프랑스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인” (native French)과 “무슬림 프랑스인” (French Muslims)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적/종교적 지배관계와 권력 불평등을 더욱 조장하고 있는 겁니다.
스콧은 미국의 다문화주의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면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프랑스의 공동체주의/보편주의만큼이나 미국의 다문화주의도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를 근절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문화주의 역시 자기들 인종끼리, 자기들 민족끼리 - 이른바 “끼리끼리”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해내면서 미국사회의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 점점 드러나고 있고요. 제가 최근에 보았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미국 대학에서 이른바 인종적∙민족적 자부심과 유산을 고취한다는 명분으로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아시아인들은 아시아인들끼리 별도로 졸업식을 거행하는 대학들이 늘어난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저는 그토록 인종분리를 철폐하려고 노력했던 사회가 어처구니없게도 (물론 이것이 이전 시대의 인종분리와는 다릅니다만) 사실상의 인종/민족 분리를 다시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국의 다문화주의에는 프랑스의 공동체주의/보편주의와는 반대방향으로 - 즉 지나치게 인종적/민족적 구분을 드러냄으로써 “공통의 미국인”이라는 정서가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요소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와 다문화주의와 프랑스의 공동체주의/보편주의는 한 사회가 인종적/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양 극단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 두 극단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 그나마 현명한 방법일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말이 그저 속 편하고 한가로운 말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스콧이 결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결국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차이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한 사회공동체의 결속력을 유지하고 장려하는 것 - 평범해보이지만 무척이나 까다로운 이 과제는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과제입니다. 이민자와 외국인 인구가 점차 늘어가고 있는 한국도 이 문제는 시간문제일 뿐 장차 곧 직면해야 할 문제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