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LK Sep 26. 2017

심리스릴러에서 광기의 호러로

영화 <마더!>를 보았습니다

거의 두 달 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글을 올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바쁘다는 핑계를 대야 할 것 같아 민망하기만 하네요. 제가 예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지난 학기에 논문제출자격 시험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북미 대학의 역사학 박사과정의 경우, 2년 정도 수업을 듣고 (코스워크), 1년 정도 준비하여 논문제출자격 시험을 본 뒤, 프로포절이라 부르는 논문작성계획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하면 박사과정 후보자 (Candidate)가 되지요. 여기까지는 북미 지역 대학의 다른 분과학문 박사과정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역사학의 경우에는 논문작성 전에 필요한 자료조사, 즉 사료史料수집을 하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중국역사 전공의 경우에는 중국 현지에 체류하며 그 지역 문서보관소에서 자료를 찾는 것이죠. 물론 인류학이나 사회학, 비교정치 등 현지조사가 필요한 다른 분과학문들도 현지 자료조사를 합니다. 전공하는 세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역사학의 경우 대략 박사과정 4년차 시점에서 1년간 현지 자료조사를 하고 그 이후 학교로 돌아와 5년차부터 본격적인 논문작성에 돌입하게 됩니다. 저는 프랑스 역사, 그 중에서 17세기 노르망디Normandy 지역을 논문 주제로 잡고 있기 때문에 올 가을부터 노르망디의 루앙Rouen이란 도시에서 1년동안 자료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여행으로 자주 왔었던 곳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프랑스에 1년동안 지내는 것은 처음이어서 여러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90일까지는 프랑스에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지만 그 이상 체류하려면 장기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인데요, 특히 여름 내내 저를 괴롭힌 것은 프랑스의 악명높은 비자 신청 과정이었습니다. 미국 비자 신청 과정은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서류와 끝없이 지체되는 처리 과정이 정말 저를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미국 주재 프랑스 영사관에서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비자 신청을 해야하니 한국-미국-프랑스, 이렇게 세 나라의 행정서류와 처리과정이 동시에 필요했고 그만큼 일처리도 느려졌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9월 중순에 루앙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제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네요. 오늘 소개해드릴 영화는 <마더!Mother!>입니다. 제대로 살 집을 구하기 전에 지금은 프랑스인 홈스테이에서 머물고 있는데 호스트 분들이 영화광이어서 벌써 프랑스 영화 두 편을 같이 봤습니다. 그러나 저의 프랑스어 청취실력은 정말 처참한 수준이라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한 그 영화들을 리뷰하는 것은 차마 안 될 것 같네요. 이후에 저 혼자서 “잠시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미국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프랑스도 미국처럼 자막달린 외국어영화 꺼려하는 건 비슷한건지, 미국영화는 프랑스어 더빙으로 상영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영어 음성에 프랑스어 자막을 달아 상영하는 회차는 드물더군요.

          <마더!>는 여러분도 잘 아실 영화 <블랙스완>의 감독인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신작입니다. 한국에서도 곧 개봉하는 것 같네요. 저는 이 감독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출연배우들이 하나같이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어서 (하비에르 바르뎀, 제니퍼 로렌스, 에드 해리스, 미셸 파이퍼) 아주 기대가 큰 영화였죠. 영화를 보고 난 제 느낌은 <블랙스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영화에 대한 평론가나 관객의 평이 아주 극단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아마 제 생각에는 후반부로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는 영화의 내용이나 스타일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제목에서 표현했듯이 영화는 중반부까지는 끊임없이 관객의 신경을 긁는 심리스릴러의 외양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도 미국영화에서 흔하게 보이는 - 교외의 외딴 집에 사는 부부, 그리고 그 부부의 평온을 깨뜨리며 찾아온 이상한 외부인 - 프레임으로 전개되는 심리스릴러라 생각했습니다. 이 프레임이 영화사에서 써먹을 대로 써먹은 흔한 소재이긴 하지만, 이 프레임을 잘 요리해서 화면에 구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중반부까지는 “뭐, 저 외부인이 뭔가 사단을 내겠군…”하는 예상대로 극은 흘러갑니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관객들의 이런 예상을 완전히 산산조각냅니다. “외부인”은 이 영화의 맥거핀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점차 종교적 상징을 차용한 우화, 또는 극단적인 초현실주의적 상상으로 넘쳐나는, 기괴한 호러로 변해갑니다. 아마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평은 바로 이 후반부의 극단과 광기로 넘쳐나는 부분에 대한 불편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관객의 눈과 귀를 괴롭힐 필요가 있나?”하는 것이죠. 저 역시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쯤에서 끝내면 되지 않을까하는 느낌, 단순히 "충격 그 자체를 위한 충격"이 너무 지나치게 덧붙여진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충격의 최대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과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한 호오와는 별개로, 저에게 이 영화가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오랫동안 반복된 서사 중 하나인, “여성의 반복되는 절박한 호소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 남성, 그리고 무너지는 그들의 관계”라는 서사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남편인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내인 제니퍼 로렌스 (영화에서 두 배역의 본명은 나오지 않습니다)의 간절한 호소, “제발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고 우리만 이 집에 있자”는 말을 외면합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완전히 아내를 방기하는 것도 아니죠. 아내가 극한의 위기에 몰리면 어디선가 남편이 나타나긴 합니다. 그렇지만 이 호소와 외면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영화는 점차 파국으로 다가갑니다. “여성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남성”이라는 지금 사회의 큰 화두 중 하나와 겹쳐보였기 때문일까요. 영화의 후반부와 엔딩은 여러모로 참 씁쓸했습니다. 영국 가디언Guardian 지의 리뷰에서는 이를 “'어머니 대지’(Mother Earth)에 대한 끊임없는 학대”를 떠올리게하는 우화라고 표현했는데요. 아르노프스키에게는 이 영화가 바로 “아무 것도 내줄 것이 없을 때까지 주고, 주고, 또 내줄 것을 요구받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제가 느낀 씁쓸한 감정도 이 표현과 어느 정도 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시면, 바로 이 마지막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작가의 이전글 "히잡의 정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