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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Jul 29. 2016

"보통 사람들"의 공감과 연대를 위한 상상력

이것이 인문학의 효용이다

이 글은 최근 한 술자리에서 지인을 통하여 듣게 된, “도대체 역사, 더 넓게는 인문학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이 크게 새롭지는 않아요. 인문학은 이미 한국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서구에서도 그 “효용”을 증명하라는 사회의 압력(그리고 모멸적인 공격도 함께)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날 그 질문의 논거는 꽤 예리했습니다. 인구의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하고, 그리고 그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취업이 순조롭게 보장되지 않는 지금 현실에서 대학의 학생과 운영진은 이른바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 물론 배워서 나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왜 역사를, 왜 인문학을 배워야하는가? 인문학을 효용이 명확해 보이는 다른 학문들과 견주어 볼 때, 인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은 무엇인가? - 이런 질문들이 제 앞에 던져지자 저는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항상 회피해왔던 두려운 문제에 직면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적어도 “내가 그냥 역사를 좋아해서 그것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싶으니까” 또는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은 인류 문화의 정수” - 이런 말은 대학의 학생과 운영진에게는 너무나 안이하고 고루한 설명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고민에 약간의 해답을 던져준 것이 바로 황현산 선생님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간접화의 세계”란 제목의 칼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본인이 춘천의 한 대학에서 근무할 때, 교수들과 춘천과 서울을 잇는 자동차 도로에 관해 나눴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분이 “옛날에는 산길로 덕두원 고개를 넘어갔는데, 하인에게 말고삐 잡히고 한가롭게 이동하던 그 때가 좋았다”고 얘기하는데, 다른 한 분이 “말 잔등에 탄 사람이면 좋았겠지만, 말고삐 끄는 사람이었으면 어떡하게요”하면서 분위기가 서늘해졌다는 일화였습니다. 선생님은 “역사적 사실 앞에서건 허구의 서사에서건 사람들은 주인공의(대개는 양반 계급의 선비나 무인이다)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대입시킨다”고 말하면서, 최근 터진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개돼지” 발언을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선생님은 한국에서 가장 큰 공분을 불러일으켰을 신분제나 개돼지 같은 자극적인 단어보다도, “구의역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가 어떻게 자기 자식으로 생각되냐며, 그것은 위선”이라고 말한 나 기획관의 발언에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다음에 이어진 선생님의 분석에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온갖 종류의 서사 앞에서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그의 하인에게 냉담한 것은 주인공이 더 높고 화려하고 더 많은 권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사의 구조에서 볼 때, 하인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다. 우리가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지만 그의 하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개의 문을 거쳐야 한다. … 우리는 주인공은 직접 만나지만 하인은 간접적으로 만난다.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은 이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하인도 끝내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선생님이 말한 대로, 구의역의 그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겨 마음 아파한 사람들과 나향욱의 차이가 바로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여기서 그 상상력이 바로 “보통 사람들”의 공감과 연대를 위한 상상력이며, 그것이 말라죽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효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연구에서 1970년대부터 부상한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바로 역사기록에서 배제된,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자리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the common people”로 일컬어지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선생님이 말한, 몇 개의 문을 거쳐야만 만날 수 있는 그 보통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열어젖히는 시도였던 것이지요. 스크린도어의 편리함과 외주업체와 비정규직 확대를 통한 비용절감의 담론이 이 세계를 지배할 때, 그 담론을 저지하고 스크린도어 뒤에 가려져있는 구의역의 아이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여러 개의 문을 열고 나서야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을 향한 공감과 연대 뿐입니다. 그리고 이 공감과 연대를 위한 상상력을 키워주는 것은 바로 인문학, 그 중에서도 문학∙역사∙철학 - 소위 문사철로 불리는 전통적인 인문학의 세 학문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인문학 연구자들은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물론 그간 상당한 성과가 축적되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와 지위를 복원시킨 그 연구성과가 교육을 통해 충분히 발현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지속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서로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며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이미 그 전조가 보이고 있듯이) 종국에는 과두정으로 변질되고 말테니까요. 제가 6월 중에 읽었던 프랑스 소설 <오르부아르>에서는, 1차대전 당시 애국주의의 광풍에 밀려서 수없이 죽어나간 평범한 프랑스와 독일의 젊은이들. 그리고 그 젊은이들의 유가족들이 그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어떻게든 치유하고자 “전사자 기념비”라는 사기극에 쉽게 말려드는 전간기 프랑스 사회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7월에 읽었던 칠레 대통령 살바토르 아옌데 전기에서는, 끔찍한 빈곤과 억압적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와중에 희생당하는 칠레의 이름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문학 속에는 국가, 전쟁, 혁명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에서 사라진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학생들이 문학∙역사∙철학 속에서 문을 열어젖혀 더 많은 보통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희망과 상처에 공감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대의 필요성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효용이자 인문학이 살아남을 길이 아닐까요?  


황현산 선생님의 칼럼 "간접화의 세계"의 링크입니다. 저는 평소 황선생님 칼럼에서 굉장히 깊은 울림과 통찰을 받을 때가 많은데요, 확실히 문학을 공부하신 분이라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나 봅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23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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