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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Nov 10. 2016

혐오와 공포에 맞서 싸우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상기시키고 떠난 힐러리

오늘 제가 공부하고 있는 대학 분위기는 그야말로 장례식장입니다. 오늘 오전에 제가 수업조교를 하고 있는 수업 결석률도 꽤 높았고 그나마 출석한 학생들도 매우 침울해 보였지요. 선생님이 수업 시작 전 판서를 하실 때, 몇몇 학생들은 잡담을 나누기도 하는데 오늘은 괴이하리만치 조용했습니다. 미국의 대학가 자체가 리버럴의 본거지여서 그런 것일까요? 수업조교 담당 선생님을 아침에 만나 인사를 건넸는데 항상 밝게 웃으시던 선생님이 “오늘은 별로 좋은 아침이 아니네”하고 말씀을 하셨어요. 지난 학기에도 이 선생님 수업조교를 했기 때문에 거의 일 년간 알고 지낸 셈인데 선생님이 이렇게 표정이 안 좋으신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충격적이시겠네요” 하고 다음 말을 건네자, “부끄럽기까지 하고, 정말 나라가 걱정된다”고 하셨습니다. 얄궂게도 오늘 수업 주제는 “The Enlightenment” (계몽주의) 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과 사무실로 가니 역시나 미국인 친구들, 동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우울함 그 자체였습니다. 리버럴 의제에 관심이 많고 집회에도 자주 참여하는 동기 한 명이 있었는데 어찌나 슬퍼보이던지, “나도 2012년에 너와 비슷한 경험했다. 지금 가슴에 구멍 하나 뚫린 것 같을 거다. 기운내라”며 위로해주고 왔습니다.

       여러 분석이 나오고는 있지만, 왜 민주당과 리버럴에 이런 재앙적인 패배가 닥쳤는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시간을 좀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어제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들었던 생각은 2012년 한국 대선과 굉장히 비슷한 패턴이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도시의 고립"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주에서 클린턴은 도시 지역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농촌∙비도시 지역에서는 트럼프가 우세했습니다. 또한 연령별 투표에서도 젊은 세대는 민주당 우세였던 반면 노년층은 공화당 우세였지요. 미국은 아마 여기에 인종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변수가 덧붙여졌겠지요. 저는 아마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 +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 + 인종주의, 혐오가 결합하여 이 결과를 만들어낸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느 것이 더 결정적이었는지는 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지요). 특히 대표적 경합주였던 오하이오 주는 제외로 하더라도 중서부의 전통적 텃밭이었던 미시간과 위스콘신 주가 공화당에게 넘어간 것은 치명타였습니다. 게다가 쇠락한 산업화 지대인 소위 “러스트 벨트”로 이 주들과 같이 묶이는 펜실베이니아 주까지 최종적으로 넘어가버렸죠.

       이런 현상이 분명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근거이며 리버럴 민주주의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 결과를 무조건 민심의 정당한 분출, 또는 기득권에 대한 정치혁명 등의 수사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기저에 깔려있는 분노가 사회경제적 박탈감에서 기원한 것이더라도 트럼프의 세계관과 구호,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지지자들은 분명히 여성∙소수자∙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그리고 노골적인 차별을 찬성한다고 한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류가 일궈놓은 가치에 정면도전하는 선택이 과연 민심의 정당한 분노나 기득권에 대한 정치혁명 등으로 호명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아침 등교하면서 무척이나 섬뜩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미국 사회의 절반이 이런 혐오와 증오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공언한 셈인데, 거리에서 저를 지나치는 미국인들의 절반이 속으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공포스럽더군요.

       여기 시간으로 오늘 (11월 9일) 정오쯤,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 인정 연설이 있었습니다. 저도 이 연설을 시청했는데요, 무척이나 슬프면서 한편으로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힐러리라는 정치인에 개인적으로도 호감이 있어서 이번 결과가 더욱 아쉽기도 합니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학창시절에 그녀의 자서전인 <Living History>에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도 있고요. 힐러리가 월가와 결탁한 주류 정치인, 정치적 이익에 따라 말을 바꾸는 정치인, 혹은 매파 정치인 등으로 거명되는 것은 일부분 진실을 담고 있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힐러리가 정치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볼 때, 적어도 그녀가 사회의 구조적인 개혁에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왔으며 (특히 의료보험 개혁과 총기규제 문제) 미국 사회의 리버럴 가치를 지키기 위해, 특히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성실히 싸워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안타까운 점은 힐러리가 물러남으로써 당분간 미국 사회의 상징적인 유리 천장이 깨지는 데는 앞으로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노골적인 여성∙소수자∙이민자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는 사람에 대항해 그 반대의 가치를 설파하던 사람이 패배함으로써, 그 가치가 수세에 몰리게 될까 염려스러운 것도 있고요. 한국에서도 이미 이러한 혐오와 증오 선동이 권력 상부의 개입에 의해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서글픈 뉴스까지 들려오는 마당에 말이죠.

       힐러리 클린턴의 오늘 패배 인정 연설은 그 점에서 슬프기는 하지만 저에게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힐러리의 연설은 그녀의 패배가 결코 리버럴의 패배는 아니며 미국인들이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더 마음을 굳게 먹고 싸워야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단순히 존경을 표할 뿐 아니라 소중히 여겨야 하는” 미국 헌법의 가치, 즉 “법률에 의거한 통치, 모든 사람이 법앞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평등하다는 원칙,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 것이라며, 앞으로도 이 가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은 “모든 인종, 종교, 남성과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 장애인 -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것”임을 덧붙였습니다. 저 역시 이것이, 비록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역사적으로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이끌어온 강력한 정치적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가치들이 철저하게 유린당했던 2차 대전이 끝난지 불과 70여 년만에, 이 가치들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려하는 미국과 유럽 사회를 보면서, 인류의 이 허망한 망각에 허탈해지기까지 합니다.

       오늘 메르켈 독일 총리는 미국 선거 결과를 평하며, "독·미 양국의 공동가치로 민주주의, 자유, 출신국·피부색·종교·성(性)·성적(性的) 지향 또는 정치적 입장과는 독립적인 법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언급했습니다. 어제의 선거 결과는 이 패배가 그 가치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그리고 미국인의 절반은 그 가치를 지키기로 선택했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더구나 선거인단의 표심이 아닌, 전체 득표의 표심은 여전히 미국의 다수는 그 가치를 지키려 한다는 희망적인 지표이기도 합니다. 미국이 벽을 쌓고 공포를 조장하며 혐오와 증오로 퇴행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수호하는 책임있는 국가가 되기를, 동맹국의 한 국민으로서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또한 독일과 미국, 또는 대서양 세계를 넘어 전세계에 번지고 있는 이 가치들에 대한 공격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우리는 결코 사람의 출신, 종교, 성적 지향, 인종, 정치성향을 근거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박해하고 죽이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새벽<뉴요커New Yorker>에 실린 에디터 David Remnick의 글 "An American Tragedy"의 마지막 단락이 그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응당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간명하게 말해줍니다. 절망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맞서 싸워야 합니다.

Late last night, as the results were coming in from the last states, a friend called me full of sadness, full of anxiety about conflict, about war. Why not leave the country? But despair is no answer. To combat authoritarianism, to call out lies, to struggle honorably and fiercely in the name of American ideals—that is what is left to do. That is all there is to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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