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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Nov 05. 2016

누가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로크의 <통치론>을 다시 읽었습니다

지난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논의를 꺼낸 이후 대략 열흘이 지났습니다. 개헌이란 말은 허망하게 증발해버렸고,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의 헌정질서를 철저하게 짓밟은 대통령에 대한 분노로 들끓고 있습니다. 두 번의 사과가 있었지만 대통령은 아직도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국민들이 왜 분노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태판단을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비록 제가 원한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정부의 실패는 결국 내 자신의 삶, 그리고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도 크나큰 충격을 미치기에 2012년 저는 진심으로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분노를 넘어 절망감과 참담함까지 느끼게 합니다. 20년 전 제가 고등학생 때의 보수정부는 IMF 환란이라는 엄청난 경제적 재앙을 가져다 주었다면, 지금의 보수정부는 한국의 정부조직과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모조리 무너뜨렸습니다. 애초에 한국에서 공적질서와 공공성에 대한 신뢰는 극히 낮았지만, 이 정부는 그나마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그 신뢰마저 산산조각냈습니다.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 고국의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며 이번 주에 읽은 존 로크John Locke의 <통치론Second Treatise of Government>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대학에서 학부생 유럽역사 수업조교를 맡고 있어서 이 책을 원전으로 다시 읽어야 했습니다. 워낙 중요한 고전이라 예전에 이미 읽었던 책이지만,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가 지금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그 울림이 더 컸다고 해야할까요. 300년 전의 로크가 말하는 정치사회와 정부의 목적은 한국의 정부와 너무나 극적으로 대비가 됩니다 (좋은 한글 번역본이 있기 때문에 번역문을 먼저 제시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덧붙이겠습니다).


사회의 권력 또는 사회에 의해서 구성된 입법부의 권력이 공동선을 넘어서까지 확대된다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 그러므로 누구든 국가의 입법권이나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는 즉흥적인 법령이 아니라 국민에게 공포되어 널리 알려진, 확립된 일정한 법률로 다스려야 한다. 그는 또한 무사공평한 재판관을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그러한 법률에 따라 분쟁을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물리력을 국내에서는 오직 그러한 법의 집행을 위해서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침해를 방지하거나 시정하고 공동체의 안보를 침입이나 침략으로부터 보장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인민의 평화, 안전 및 공공선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서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존 로크 지음, 강정인, 문지영 옮김, <통치론> (까치, 1996), 123).
… the power of the society, or legislative constituted by them, can never be supposed to extend farther, than the common good; … And so whoever has the legislative or supreme power of any common-wealth, is bound to govern by established standing laws, promulgated and known to people, and not by extemporary decree; by indifferent and upright judges, who are to decide controversies by those laws; and to employ the force of the community at home, only in the execution of such laws, or abroad to prevent or redress foreign injuries, and secure the community from inroads and invasion. And all this to be directed to no other end, but the peace, safety, and public good of the people.


       저는 이 문단을 보면서 한 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지금 우리 국가의 최고 권력자는 즉흥적인 “법령”은 커녕 즉흥적인 “의지”로 국정을 운영해왔을 뿐더러 그 의지조차도 인민의 평화, 안전 및 공공선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자기의 내밀한 수족같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왔던 겁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로크의 논의는 더욱 신랄합니다.


국가는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통치권은 즉흥적인 명령과 불확실한 결정이 아니라 선포되고 승인된 법률에 따라야 한다. 만약 인류가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들을 다중의 결합된 권력으로 무장시키고——그들의 행동을 지도하고 정당화할 아무런 기준도 제시되지 않은 채——그들의 즉흥적인 생각이나, 무절제하고 그 순간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의지에 근거한 터무니없고 무제한적인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도록 강요받는다면, 인류는 자연상태에서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가진 모든 권력은 오직 사회의 선을 위한 것이므로, 그것은 자의적이고 제멋대로 행사되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확립되고 선포된 법률에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 (같은 책, 132-133쪽).
And therefore whatever form the common-wealth is under, the ruling power ought to govern by declared and received laws, and not by extemporary dictates and undetermined resolutions: for then mankind will will be a far worse condition than in the state of nature, if they shall have armed one, or a few men with the joint power of a multitude, to force them to obey at pleasure the exorbitant and unlimited decrees of their sudden thoughts, or unrestrained, and till that moment unknown wills, without having any measures set down which may guide and justify their actions: for all the power the government has, being only for the good of the society, as it ought not to be arbitrary and at pleasure, so it ought to be exercised by established and promulgated laws;


       과연 우리는 이 대통령과 정부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로크는 이에 대한 해답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제(專制)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선, 곧 어느 누구의 권리에도 속할 수 없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제는 누구든 자신이 그 수중에 장악하고 있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되, 그 지배하에 있는 사람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별도의 이득을 위해서 행사하는 것이다. 전제적 통치자는 그 칭호가 무엇이든 법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준칙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의 명령과 행위는 인민의 재산의 보존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야심, 복수, 탐욕 또는 그밖의 다른 일시적인 정념의 만족을 지향한다 (같은 책, 139쪽).
… so tyranny is the exercise of power beyond right, which no body can have a right to. And this is making use of the power any one has in his hands, not for the good of those who are under it, but for his own private separate advantage. When the governor, however, intitled, makes not the law, but his will, the rule; and his commands and actions are not directed to the preservation of the properties of his people, but the satisfaction of his own ambition, revenge, covetousness, or any other irregular passion.


       그간 언론을 통해 대략적으로 밝혀진 대기업 강제모금, 그리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임기를 보장받은 공무원을 축출하는 등의 행위가 위에서 말한 전제적 통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전제적 통치의 1차적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 수족들에게 있습니다만, 사실 저는 이를 부추기고 또는 방관 내지 묵인해온 집권여당과 보수언론의 태도가 더욱 가증스럽습니다.  아직도 저는 국정감사에서 주요 혐의자들에 대한 증인채택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여당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최고 권력자로서 함량미달이라는 점, 그리고 그 주변에서 온갖 불법행위가 자행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사익을 위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것이지요. 또한 박근혜를 지지했던 유권자들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문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와 사기업경영이라는 것이 명백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도 기업처럼 운영하겠다는 사람에게 국가와 공동체의 운명을 내맡겼습니다. 그 결과는 국가의 “사기업화”였죠. 공공성이 무너져내린 사회의 종점은 다들 아시다시피 세월호 침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아무런 신념과 철학도 없을 뿐더러 국회의원을 제외한 어떠한 공직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국가의 권력을 위임했습니다. 단지 “박정희 신화”에 기대서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 허망한 신화가 처절하게 붕괴되는 과정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사회와 공동체를 원하는 것일까요?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이 우리에게 전해준 교훈이 있다면 바로 민주주의는 우리의 일상과 밀착해야 한다는 점일 겁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책에서 등장하는 단어에 불과할 뿐이죠. 저는 이 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시대를 앞서갔다고 봅니다. 물론 노무현 정부 역시 민중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감성은 무척 예민해졌습니다. 이 정부에서 구현되었던 “협치” 모델이 바로 그 사례일 겁니다. 정부의 권한을 배분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정책과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 이 과정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아마 사회경제적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도 충분히 진지하게 모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정권이 바뀐 후 고사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지난 10년 간 소통과 개방적 구조는 커녕 밀실에서 자기들끼리 적당히 결정하고 통보하는 식의 권위주의적 정부 모델로 회귀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개혁하는 열쇠는 바로 우리가 얼마나 민주공화국 모델에 부합하게 우리의 정치사회와 정치문화를 바꾸어 나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민주주의와 경제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믿으며 방법은 어떻게 되든지 내 욕망만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정치가 우선이라고 생각한다면 헬조선은 아마 영원한 지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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