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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Oct 10. 2016

리버럴 민주주의의 두 번째 종말

범유행병처럼 전세계로 번져가는 극우

       어제 이곳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습니다. 소설 <빅 픽처>로 유명한 작가 더글러스 케네디가 체류 중인 파리에서 인터뷰를 했는데요. 그는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이길 것으로는 보지 않지만, 만약 그가 이긴다면 미국 버전의 무솔리니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브렉시트가 현실화된 영국, 그리고 EU 탈퇴를 놓고 국민투표를 부추기는 유럽 대륙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극우의 부상이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고 덧붙였지요. 


트럼프는 여성혐오주의자이자 염세주의자다. … 그는 캐나다 크기만한 에고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게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으며 책도 읽지 않는다.  … 만약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트럼프는 아메리칸 무솔리니가 될 것이다. 


사실 처음 이 기사를 찾아본 것은 작가의 “캐나다만한 에고를 가졌다”는 언급이 너무 재미있어서였습니다. 하지만 더글라스 케네디의 우울한 전망, “트럼프는 결국 미국 버전의 무솔리니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저에게 결코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트럼프의 부상, 브렉시트, 그리고 유럽에서 번져가는 EU 탈퇴 바람. 이런 현상들은 바로 저에게는 2차 대전 종전 이후 적어도 유럽과 미국에서만큼은 굳건했다고 생각했던 리버럴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신호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번역되곤 하는 Liberal Democracy는 마땅한 번역어를 찾기 어렵습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번역하면 무슨 말인지는 대충 감이 오지만,  주의가 두 번이나 반복되면서 더 아리송한 느낌을 주고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한국에서 반공주의를 윤색하기 위한 용어로 변질되어버려서 Liberal Democracy라는 말이 가진 함의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리버럴 민주주의라는 말이 - 여전히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 그나마 대안적인 용어라고 봅니다. 리버럴 민주주의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 특성을 정리해 볼 수는 있겠지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등 시민의 기본적인 정치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며, 인종이나 성별, 또는 지역에 의거한 차별을 금지하고, 일당독재가 아닌 다양한 정당이 활동하면서 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될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리버럴 민주주의 사회로 지칭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리버럴 민주주의 사회라고 불릴 수 있는 국가들은 유럽과 미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유럽과 미국이 처음부터 리버럴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던 사회였을까요? 적어도 유럽에 국한해보자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예전에 근무했던 곳에서 수업 교재로 사용했던 역사서 중에 마크 마조워(Mark Mazower)라는 역사가의 <암흑의 대륙 The Dark Continent>라는 책이 있습니다. 20세기 유럽 현대사를 조망하는 이 책에서 저자는 적어도 2차대전 종전 이전까지, 20세기 전반부 유럽을 보면 리버럴 민주주의는 절대로 전도유망한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유럽인들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진지하게 끌리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거지요. 

       왜 그랬을까요? 마조워는 리버럴 민주주의가 정치적 자유에만 몰두하다가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에 무관심했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봅니다. 유럽인들은 점차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개선시키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되었다는 것이죠. 특히 대공황의 여파가 유럽으로 번져나가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힘을 얻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파시즘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면서 유럽인들에게 “재생”과 “갱신”이라는 구호를 내걸며 다가갔습니다. 현실 문제에 아무런 매력적인 의제도 제공하지 못하는 리버럴 민주주의자들보다 자신들이 사회를 새롭게 바꿀 수 있다고 소리높여 외치는 파시스트들이 더 신뢰할 만한 정치세력으로 여겨졌던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암흑의 대륙>은 유럽에서 리버럴 민주주의가 정치적 대안으로 진지하게 고려되기 시작한 것은 인종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나치의 폐해를 2차 대전이라는 대재앙으로 경험하고 나서, 그리고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협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자유의 보장만으로는 부족하며, 민중들의 사회경제적인 조건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 이후에야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유럽에 리버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결합이 도래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결합을 가능하게 했던 고도의 경제적 성장기가 막을 내리면서 리버럴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EU가 이 위기에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EU라는 기반 덕택에 자본, 인력, 상품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경제적인 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유럽에서 다시는 양차 대전과 같은 재난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지만, 유럽인들은  EU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유럽의회 의원선거에 투표를 하면서도 자신들의 의사가 이제는 거대한 관료기구가 되어버린 EU의 의사결정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죠. 여기에 점점 거세지는 무슬림 문제와 이 불안감을 이용하여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 무책임한 극우 정치인들이 가세하면서 유럽에서는 반이민, 반이슬람 정서가 결합된 극우 세력이 이제 정치문화의 상수가 되어버렸습니다. 

       트럼프, 브렉시트, 그리고 유럽의 극우정당 지지자들을 관통하는 정서는 바로 “박탈감”일 겁니다. 기존의 정치인들과 정치구조가 자신들을 방치하고 외면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세 그룹의 지지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반이민∙반이슬람∙반외국인이라는 지향점을 공유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테니 외부인은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이자, 그동안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을 설파해온 리버럴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지요. 리버럴 민주주의가 우리 삶을 개선시켜주지 않는다면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전세계에 마치 범유행병처럼 번져가는 극우세력을 보면서 저는 전간기에 이어 리버럴 민주주의의 두 번째 종말이 임박한 것은 아닐까하는 암울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극우세력 지지자들의 박탈감을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면 이 범유행병은 결국 우리를 집어삼키고 말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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