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와 성매매의 연결고리
제가 이 글을 구상하게 된 것은 친구들과 최근 연이어 터지고 있는 연예인과 정치인들의 성폭행∙성추행∙성매매 사건들의 맥락을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 대화는 자연스럽게 지난 5월에 강남역 인근에서 발생한 여성 피살 사건으로 이어졌지요. 자신들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 그 피해 여성과 똑같은 처지가 될 수 있었다는 공포감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잔혹하게 살해된 피해 여성의 모습은 많은 여성들을 결집시켰습니다. 이 피살 사건이 촉발시킨 추모 시위와 공적 공간의 논의를 통해 제기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여성혐오였습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일상의 성희롱-성추행-성폭행-살인이라는 연쇄적인 악순환의 고리는 바로 사회에 깊숙하게 스며있는 여성혐오의 발현이라는 것이죠.
저는 사실 이 범죄가 여성혐오 범죄인지, 묻지마 살인인지를 결정하는 논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범죄에서 여성혐오와 묻지마라는 두 가지 프레임은 상호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바로 여성차별이라는 “완곡한” 어법으로 표현하든, 여성혐오라는“센” 어법으로 표현하든지 간에, 이미 한국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갖가지 폭력과 차별, 그리고 혐오가 만연해 있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 친구 중 한 명이 지적한, 성매매와 여성혐오의 연결고리였습니다. 여성혐오의 기원이 바로 성매매이며 여성의 성을 사고파는 행위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여성을 쉽게 도구화하거나 대상화하는 관행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었죠. 공교롭게도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유명인들의 성범죄는 고국에서 계속해서 터지고 있네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는 제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것이 바로 노예제였습니다. 이러한 연결과 비교가 다소 극단적일 수도 있지만, 저는 여성의 몸을 사고팔 수 있다는 생각, 성매매는 너무나 오래된(그리고 “자연스러운”)제도라서 인위적으로 없앨 수 없다는 생각, 자발적 성매매는 하나의 직업으로서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 등 - 이러한 생각들이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인종에 기반한 흑인 노예제를 열렬하게 옹호했던 노예제 지지자들의 세계관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 순간 소름이 끼쳤습니다.
첫째로 당시 농장주를 비롯한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노예의 몸을 매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습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자 “재산”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여성의 성을 사는 남성이 여성을 가축이자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 사람의 몸을 돈으로 일정기간 살 수 있고, 그 구매한 몸을 내가 일정기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시 노예를 구매한 사람들의 생각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네요.
두 번째로 성매매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너무나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제도라서 쉽사리 근절할 수 없다는 생각. 노예제 지지자들 역시 성서와 각종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노예는 우리 곁에 언제나 존재해 온 이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발적 성매매와 “나쁜”성매매를 구분하는 사람들처럼, 노예제 지지자들도 나쁜 주인과 착한 주인의 이분법을 구사했지요. 착한 주인은 노예를 아끼며 그런 주인에게서 벗어나면 노예는 오히려 생계를 잃고 더 처참한 상황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말에서 자발적 성매매는 생계를 위한 것이므로 허용해서 양성화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연상되는 건 정말 터무니없는 것일까요?
한 인간의 몸을 가축이나 재산처럼 처분할 수 없다는 사고가 확산되면서 노예제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 갔습니다. 마치 제방에 조그만 구멍이 뚫렸을 때는 땜질로 막을 수 있지만 사방에서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면 붕괴를 되돌릴 수 없듯이, 노예제는 그렇게 사라져갔던 겁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몸을 구매하여 사용하고 처분할 수 있다는 세계관은 결코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19세기만 해도 그 세계관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천에 널려있었습니다.
여성의 몸을 구매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 설령 그 기간이 1시간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에 의해 처분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에서 이미 성매매가 불법화되어 있는데 그럼 된 것 아니냐고 말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이 문제가 단순한 합법화-불법화, 그리고 한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는 좀 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소라넷 사이트가 보여주듯이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도구화하고 대상화하는 사고와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고, 자발적 성매매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들이 보여주듯이 여성의 몸은 아직도 합법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사고 팔리고 있기 때문이죠.
강남역에 모여서 여성혐오 퇴치를 외친 여성들의 시위를 불편해하던 시선, 그리고 페미니즘에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끼는 남성들. 이러한 풍경 속에서 제가 18-19세기, “흑인 노예도 당신들 백인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말에 노예제 지지자들이 느꼈을 충격과 당혹감을 떠올렸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요? 가축으로 여겼던 이들이 똑같이 사고하고 똑같이 투표하고 똑같이 공적 공간에 참여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은 백인 노예제 지지자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대입해보자면, 가축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몸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존재들이 점차 목소리를 크게 내고 너희와 나는 완전히 동등한 존재라고 외치는 것이죠.
누군가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불법화되었지만 여전히 유사노예제는 성행하고 있다. 그리고 인종주의도 여전하다. 성매매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적어도 제대로 된 양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노예제를 인간에게 행해질 수 없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성매매도 똑같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성매매 불법화는 이 인식의 대전환 과정에서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겠죠. 이러한 사고가 확산되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때 (물론 이것조차도 끝은 아닐겁니다), 우리는 비로소 여성폭력∙여성차별∙여성혐오라는 공고한 제방에 중요한 균열을 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이 글을 구상한지가 한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서야 올리게 된 것은 메갈리아와 관련해서 터진 한 성우의 계약해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 글이 여성혐오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한, 어떤 식으로든 그 문제와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로서도 그 사건에 대해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었고요. 사실 많은 분들이 지적하듯이,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미러링" 전략은 어느 정도 유효했고, 극심한 여성 혐오와 차별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무기였다는 데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것이 궁극적이자 장기적인 페미니즘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특히 메갈리아의 분열 사태를 몰고 왔던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아웃팅을 주도하려 했던 움직임이야말로, 증오에 기반한 운동이 어디까지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은 항상 (물론 언제나 좋은 관계이진 않았겠지요) 성소수자들과 함께해 왔습니다. 이성애자 (백인)남성이 "정상"으로 취급받는 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되는 존재로서 여성과 성소수자는 그 아픔을 이해하고 서로 단합할 수 있었죠. 성소수자들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웃팅이라는 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려 하는 사람들이 과연 차별과 배제의 아픔을 말할 권리가 있을까요?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의 정당화가 횡행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미 20세기 전체주의 체제들의 비극이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죠. 홀로코스트 생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대계 이탈리아인 작가 프리모 레비가 생전에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을 비판하면서, "나치가 희생자들을 타락시켜 끝내 자신과 닮도록 만들었다"고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일베라는 괴물을 끊임없이 증오하다가 결국 메갈리아도 그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