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이슨 본>을 보았습니다
8월이 되어 처음으로 글을 씁니다.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새 학기를 앞두고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서 이렇게 되었네요. 하지만 또 이번 글이 영화를 보고 쓰는 글이라 영화 볼 시간은 있었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핑계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주에 영화 본(Bourne) 시리즈의 최신작인 <제이슨 본>을 보았습니다. 저는 2002년에 <본 아이덴티티>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온 이 시리즈 영화의 팬이기도 하고, 주연배우인 맷 데이먼과 2편 < 슈프리머시>부터 시리즈의 감독을 맡았던 폴 그린그래스의 작품들을 좋아하기도 해서 4편이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를 무척 기다렸던 터였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3편인 <본 얼티메이텀>을 끝으로 할 만한 이야기는 다 풀어놓았고 어느 정도 깔끔하게 마무리했기 때문에 4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무슨 새로운 이야기가 더 있을까하는 의구심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새 주연배우를 기용해서 중간에 <본 레거시>라는 리부트 작품을 시도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4편이 뭔가 사족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본 시리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차 추격전, 그리고 인간의 신체가 “날것 그대로” 부딪히고 주변 사물을 최대한 활용하거나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워크를 활용해서 긴장을 극대화시키는 액션 장면을 만들어내는 점은 여전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저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영화에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은유가 녹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제이슨 본과 그를 도와주는 전직 CIA 요원인 니키가 그리스 아테네 시내에서 다시 시작된 CIA의 추적을 피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아테네 시내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고 있는 혼돈의 아수라장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장면은 바로 최근 “그렉시트” 위기를 촉발했던 그리스의 경제위기에 대한 은유임이 명백합니다. 혼란의 한가운데에 놓인 아테네 시내는 영화에선 초반부의 배경 정도로만 제시되지만 곳곳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그 광경은 저에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 국제뉴스에서 그리스에 관한 소식이 매우 뜸해졌기 때문이죠. “브렉시트”라는 더 큰 문제에 파묻혀버린 걸까요? 지금 그리스 시민들은 당시의 그 위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또 그리스인들은 이전에 시행됐던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은 - 즉 가혹한 긴축을 조건으로 구제금융이 제공되고 있는,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물론 그리스 사회가 곳곳에 만연한 탈세와 부정부패로 지금의 경제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애초에 그리스의 경제적 체질을 과대평가하고 대책없이 유로존에 편입시켜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었던 유럽의 경제선진국들에도 책임이 없다곤 할 수 없겠지요. 그리스의 치프라스 총리가 새로운 사회와 현실을 만들겠다고 집권했지만, 저로서는 어쩌면 그리스 시민들이 결국 자신들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을 느끼며 쓰라린 환멸을 감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더 선명하게 직접적으로 드러났던 현재 사회에 대한 은유는 바로 국가안보와 개인의 자유(사생활)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SNS기업 CEO인 칼루어, 그리고 CIA 국장인 듀이의 대화에서 잘 드러나지요. 사실 둘은 협력 관계이긴 하지만 듀이가 대놓고 새로운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백 도어”를 달라고 요구하고 칼루어가 이를 거절하면서 대립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듀이의 대사에서 나타나는 “국가안보”와 칼루어가 이야기하는, "사생활은 타협할 수 없는 자유"라는 대목에서 그 대립은 정점에 달하지요. 많은 분들이 이 장면에서 최근 미국에서 아이폰의 암호를 해제할 수 있는 백 도어를 둘러싸고 가열된 FBI와 애플 간의 논쟁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또한 한국에서 논란 끝에 통과되었던 테러방지법이 연상되기도 하겠고요. 애플은 백 도어를 제공하라는 법원의 판결과 여론의 압박 속에서도 한 번 선례를 허용하면 돌이킬 수 없다며 끝까지 암호 해제에 접근할 수 있는 백 도어를 열어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수색영장 없이 수사기관의 “협조요청”만으로도 메신저 통신내역을 넘겨주었던 몇몇 한국 기업들의 사생활에 대한 빈곤한 인식과는 무척 대조적이었지요. (그러나 애플과 구글을 비롯한 미국의 정보통신기업들도 이렇게 사생활과 자유의 수호자인 것처럼 굴다가 중국의 검열 요구에는 정작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지적해야겠지요)
물론 애플의 대응, 그리고 사생활과 개인의 자유를 마냥 장밋빛으로만 보려는 것은 아닙니다. 전세계적으로 테러가 일상화되고 있는 지금, 개인의 자유만 무조건적으로 외치기에는 저도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기 때문이죠. 특히 저는 한국에서 카카오톡 감청과 테러방지법이 논란이 되었을 때, 이른바 “사이버 망명” 메신저로 부각되었던 텔레그램이 떠올랐습니다. 텔레그램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중요한 가치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대안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안전함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이 이 텔레그램을 자신들의 계획 논의에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이 역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국가안보와 개인의 자유. 이 두 가치를 모두 실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합의점을 잘 찾아내야 한다는 말. 그것조차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고요.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서 진지하게 논의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속영장에 대한 법원의 심사는 바로 17세기 영국에서 등장한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의 전통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라틴어로 “You may have the body”란 뜻을 가지고 있는 Habeas Corpus는 바로 사람의 신체를 “불법적”이고 “자의적”으로 구속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개인의 인권과 자유에 있어서 중대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적절한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신체를 구금할 수 없다는 원칙. 이것은 비단 개인의 신체 뿐 아니라 개인의 모든 정신활동에도 적용되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이런 문제를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고 대수롭게 여기거나 제쳐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9월 중순에는 미국 국가안보국의 대규모 개인정보 수집 프로젝트를 폭로한 이후 러시아의 망명객이 된 에드워드 스노든을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고 합니다. 그가 “반역자”인지, 아니면 “내부고발자”인지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에 대한 영화가 투자를 받기도 또 배우를 섭외하는 데에도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이른바 “반골” 감독으로 유명한 올리버 스톤이 영화의 감독을 맡았다는 점은 우리가 소위 인권 선진국이라 생각하는 서구 사회에서도 여전히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에 대한 유형무형의 압력이 존재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 영화도 꼭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