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을 즐기는 창업자 VS 안정을 기대하는 연인
나는 학벌도, 직장 경력도 특출난게 없었고, 스타트업이라는, 남들보기에 말도 안되는 작은 기업들에만 몸을 담았었다. 그에 반해 여친(현 와이프)은 외고에, 석사에, 안정적인 네카라쿠베당토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사업하러 갈려고 하는데, 같이 남아공 가자.”
서울에서 살고 싶어하는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홀로 생각하며, 자녀를 생각하고, 노후를 생각하는데 전혀 각이 나오지 않았다.
- “나는 한국에서 특별하지 않은 안정적인 삶을 원해. 그리고 나에게 투자한 부모님에 기대치에 맞는 직장경력을 원해. 같이 못 갈거 같아.”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한국의 배우자들의 바램을 풀어보면 대충,
- 9시-18시 근무에 매달 들어오는 일정한 급여,
- 남들 쉴 때 가는 휴가,
- 월급모아 최소 서울/경기도권내 아파트 1채,
- 자녀(들) 키우며 단란한 삶을 사는
모습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사업과 스타트업에 몸담은 우리는
- 9-18시 근무는 커녕, 내가 일하지 않으면 당장 다음달 회사의 생존을 예측할 수 없고,
- 남들 쉴때 당연히 일하며, 향후 5-10년간 제대로된 휴가는 없다고 봐야 하며
- 제대로 잘되는게 아니면, 노후가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녀의 평범한 꿈과 사업/스타트업을 향한 내 꿈의 상생이 불가능해보인다.
1️⃣ 연인의 고민
얼마나 무모한 도전인지 아는 우리에게 스타트업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종교와도 비슷하게 진화하는데, 파운더가 갖혀 있는 스타트업의 버블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이는 초기에 어느정도는 필요하다), 우리의 배우자들은 반드시 더 강하게 아래의 의문들을 갖게 된다.
A/ “도대체 이 관계에서 우선순위는 언제 바뀌는건가?”
처음엔 2-3년만이면 될듯 했는데, 한국의 평균적인 유니콘은 14년이나 걸린다(중국 4년, 미국 7년). 비교적 안정적인 Series B 구간이 7-8년차에 정-말 운좋게 찾아온다고 해도, 이때까지 파운더는 매일 전쟁을 치뤄야 한다.
보통은 Death Valley를 지나간 스타트업 2-3년차에 결혼/자녀 얘기를 하게 될텐데, 이 뒤로도 4-5년 지속될 상황에 맘을 단디 먹어야 한다.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배우자는 그동안 수십 번, 수백 번, 투자자, 고객, 직원에게 수시로 우선순위를 빼았겼던차, 결혼과 육아를 계획하는 상황에, 변하지 않는 상황들을 지켜보며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B/ “우리 미래의 방향은 합의된건가?”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스타트업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어버린다. 오래 사귄 친구가 팀원/고객이 되기도 하며, 내가 살아야 하는 지역도 사업전략에 따라(한국에서 미국으로, 강북에서 강남으로 등) 수시로 바뀌며, 개인 대출을 땡겨야 할때도 있고, 풍족할때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들이 우리, 나아가 연인의 미래에 알게 모르게 합의없이 스며든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동안 배우자의 스타트업 모멘텀에 삶이 노출된 연인들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해왔다는 점을 특정 시점에 깨닫게 되며, 앞으로의 미래도 변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자신의 미래에 대해 파운더보다 훨씬 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다만 표현만 안할 뿐이다.
C/ “회사가 망하면 우리도 끝나는 거야?”
결국, 1번 2번의 이유들이 합쳐져 스타트업이 흔들릴 때마다 연애도 흔들리게 되는데, 파운더 입장은 ‘나는 스타트업, 즉 인생의 미래도 모르는데, 연인은 연애의 미래를 묻는다’라고 되묻게 되니 미래 계획을 미루게 되고, 대화의 진전이 쉽게 오지 않는다.
2️⃣ 몇가지 팁
A/ 연인에게 창업을 이해시키려 하지 말아라.
기업에 묶인 월급쟁이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고, 답이 안나오는듯 해도, 이는 쉽게 좁혀질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이다. 좁힐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 연인은 사실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공감해주고, 존중해주기를 가장 바라고 있다.
내 경우, 창업가로써 자본주의 원리를 다 몸소 깨우친듯한 투로 여자친구와 대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방식의 소통은 신뢰만 실추시킨다. 특히 스타트업 파운더들은 직업 안정성에 대해 알게 모르게 상처가 많다보니, 나를 가장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배우자에게도 똑같은 방어기재가 발동되어, 스타트업 안정성에 대한 모든 대화를 F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파운더들이여, 연인의 불안을 인정하고 대화하라.
B/ 연인은 ‘안정’을 원하고, 나는 ‘도전’을 원한다.
사실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큰 위험에 베팅해서, 얻어지는게 많은 시점이 있는가 하면, 사려서 롱런하는 시점도 생긴다.
나는 창업가들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강력 추천하는 사람 중 하나인데, 이유는 창업가로써 리더로써 팀원으로써 더 좋은 면모를 발굴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배우자와의 지난 10여년의 관계를 통해 직장과 인생의 심리상담과정을 받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와이프의 Second Opinion 혜택을 톡톡히 봤다. 내가 현재 VC로 일하게 된 것도 사실 와이프 때문이었다.
중간점으로 수렴하려는 행위가 날카로움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 경험상 그렇지 않고 오히려 관점이 넓어지고, 하나의 문제에 CPU가 두개 생기는 것에 가깝다. 사업적인 날카로움은 사실 어떤 기획에 대한 날카로움이 아니라, 결단력인데, 배우자라는 인생의 가장 큰 우선순위가 정리되는 순간 더 단호하고 단순한 결정들을 내리게 된다.
따라서 최대한 일찍부터, 차이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나는 와이프가 원하는 안정적인 삶의 가치를 받아드리기 시작한 뒤, 더 좋은 사업가로 변화했다고 단언할수 있다.
C/ 합의하, 계획된 도전을 하자.
여기서의 키워드는 ‘힙의하’ 인데, 파운더는 우주의 중심인 내 스타트업(= 조급함, 강박, 집착)을 내려놓고 배우자와 삶의 비전에 대해, 유지하려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서로에게 납득되는 합의점을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이런 합의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 스타트업을 언제까지 어떻게 키울것인가 (Exit의 시나리오)
- 직원들에게 어떻게 대할것인가 (파운더에게도 적용되는 보상과 복지)
- 어떤 가치를 만들고자 하는가 (회사의 비전)
이러한 고통의 합의가 끝나면 위 B번에서 언급한 결단력과 Second Opinion의 혜택을 무한대로 즐길수 있게 된다.
스타트업을 모르는 배우자였지만, 내 인생의 반쪽을 함께 할 사람이기에 우린 모든걸 나눴고, 와이프는 이제 스타트업/VC 프레임워크들을 꽤나 잘 이해한다. 나 역시, 개발의 ㄱ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와이프의 소소한 개발팀 에피소드들에 ‘맞다 틀리다’ 맞장구 쳐줄수는 있게 되었다.
D/ 자주 Celebrate 하자.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한국에서 창업자의 배우자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큰 헌심을 야기하기에 난 우리 파운더들이, 배우자들에게는 많이 넉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은 참고로 월급을 모아서 Exit하려는게 아니기 때문에 (Downside risk),
- 잦은 외식
- 잦은 마사지
- 잦은 선물
- 잦은 호캉스/여행
은 매우 효과적인,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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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Sirogane Harbour, Biei, Sapporo.
· 실리콘벨리를 품는 창업가들을 위한 영어 뉴스레터 - https://lnkd.in/gK67Fw_u
· 주말에도 일해야 할 때, 배우자 삐지지 않게 하는 법 - https://lnkd.in/gdW3ibm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