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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경 Aug 04. 2023

'INFJ' K의 프리랜서 생활

번역과의 로맨스 6화


'예수와 히틀러가 공존하는 MBTI'.


처음 접했을 때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으로 MBTI를 검사해 보니 결과는 'INFJ, 선의의 옹호자(현재는 앞부분이 삭제되고 옹호자라고 뜬다)'가 나왔다. 선의의 옹호자라는 말이 아주 와닿지는 않아서 대충 캡처만 해두고 사진첩에 처박아뒀는데, 어느 심심하던 날 MBTI 유튜브와 책에서 INFJ의 설명을 보고 들으며 어느새 나도 MBTI를 긍정적인 눈으로 관찰하게 되었다. 

원래 병원에서도 힘든 이유를 몰라 찾아온 환자에게 정확한 병명을 알려주면, 자신이 힘들었던 원인을 칭하는 단어를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가끔은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알게 되기만 해도 위로받은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나에 대해 'INFJ'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 내려주는 것만으로 내가 힘들었던 원인을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INFJ들이 생긴 것만으로도 기뻤다.


I이기에 내향형, N(직관형)이기에 작은 부분보다는 큰 틀을 중요시한다. F(감정형)라서 사람과의 관계에 많은 힘을 소모한다. J는 계획형이다. INFJ는 전체 F(감정형) 중에서 가장 T(사고형)의 성향이 아주 강해서 겉으로는 공감하지만 속으로는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팩트 폭력할 때가 많다. 내향형이어서 이를 겉으로 자주 드러내지는 않는다. 아주 긴밀해지기 전에는 상대의 기준에 맞춘 가면을 쓰고 상대를 대할 때가 많다. 리액션이 좋다.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상대방에게 공감을 잘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가면을 쓰고 잘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힘들어서 가면이 벗겨질 때가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가면을 쓰기 쉬운 단기적인 관계에서는 I(내향형)보다는 E(외향형)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다. 실제 모습은 I이지만 어차피 잠깐 보고 끝날 관계이니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는 활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일할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나도 놀랄 만큼. 단기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니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항상 생긋생긋 웃는 얼굴에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투, 다른 사람이 어려워하는 부분은 나서서 도와주려는 마음, 어디에도 쭈그러지지 않을 듯한 뻔뻔함과 자신감. 실제 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지만 어차피 이번만 보고 안 볼 사람들이니 다소 거리낌 없이,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배려를 당당하게 할 수 있다.


덕분에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학교에 다닐 때 짧게 진행한 PPT 발표 수업에서는 A+의 성적을 받고, 단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통역을 할 때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일본인에게 한국어를 1회 최대 50분 가르치는 일을 겸업할 때도 성과를 남겼다. 처음에는 내가 잘 해냈는지 긴가민가했지만 나에게 남은 클라이언트의 평가와 돈을 보니 내가 어느 정도 이쪽 방면으로 실력은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코로나19가 많이 수그러들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 회사 직원들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통역 업무도 늘어났다. 그중 하나는 처음엔 오후 6시까지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변경되어 저녁 식사까지 동행하며 통역하는 긴 일정이었다. 아침에는 편안하게 대화하는 자리라고 들었지만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만나서인지 관련 용어가 계속 나왔고, 내 옆에 놓인 마시라고 받은 아메리카노가 녹아 밑부분이 흥건해질 때까지 거의 마시지 못한 채 귀를 쫑긋 세워 듣고 통역했다. 점심때는 한국 요리가 코스로 나오는 가게에 들렀다가 오후에 다른 업체 몇 군데를 들러서 통역하면서 PPT 발표를 돕고, 술이 곁들여진 저녁 식사 자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 몸을 싣자 원래 내성적인 모습이던 나로 돌아왔다. 저녁에 조금 먹은 고기가 맛있었지만 통역에 신경 쓰느라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약간 체한 듯했다. 집에 와서 씻고 소화제를 먹은 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전에 휴식을 취하고 오후부터 번역 일을 하는데, 간헐적으로 '어제 문제는 없었겠지?'라며 계속 자신에게 자문자답하는 나를 발견했다. 원래 통역할 때는 마치고 나서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제 통역에도 문제는 없었다. 단 어제는 평소보다 인원이 매우 많은 상태에서 진행했기에 혹시나 내 모습이 예의 없어 보이지는 않았을지 신경이 쓰였다. '나는 클라이언트의 뜻을 열심히 알리고, 홍보하고, 긍정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한 행동들이 너무 나대는 성격처럼 보이지는 않았겠지? 문제없었겠지만 잘 마무리한 거겠지?' 어느새 어제 뻔뻔함과 자신감으로 무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작은 잡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심쟁이로 변해 있었다. 

오후 4시 정도였을까? 해당 안건의 담당자가 '멋진 후기를 공유합니다'라는 제목과 함께 '통역의 정확도, 사전 준비는 물론 통역사님의 인품이 훌륭하셔서 이번 출장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클라이언트의 후기를 받고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휴우...


통역과 달리 번역은 사람과 대면할 필요가 없어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받을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보다 납품일 지키기, 일정 수준 이상의 번역 수준 지키기, 메일 답장 빨리하기... 등이 더 중요하다. 나는 업무의 성격이 다른 번역과 통역을 나에게 적절한 수준으로 맞춰서 일하는 지금이 가장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세상에 번역가는 많고 일하는 방식도 크고 작게 다르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에게 맞는 프리랜서 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게 좋다.

 

물론 프리랜서에게 이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재미를 느끼는 일 하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모두 결정해야 하는 프리랜서로 일하는데 적어도 자신이 재미를 느끼는 일, 잘하고 싶고 욕심이 생기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배구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하이큐'에서는 츠키시마가 주인공 히나타에게 "사람에게는 적성이란 게 있는 거야. 너처럼 키가 작은데 어떻게 배구를 하려고 해?"라고 말하며 기를 죽인다. 이때 히나타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어떡해!"라고 외쳤고, 이후 갈고닦은 체력과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팀에서 주전으로 올라선다. 

히나타는 배구를 좋아하고, 재미를 느끼고, 잘하고 싶어 한다. 이는 우리 자신이 번역을 하며 재미를 느끼고, 좋아하고, 자신만의 프리랜서 생활 방식을 찾아 나가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프리랜서 김연경


#프리랜서 #번역가 #INFJ #인프제 #번역과의로맨스


해당 글은 창작의 날씨에도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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