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인생은 면 요리 같았다. 올해 후루룩 들이키다가 톡 끊긴 면처럼 내 뜻과 달리 소중한 인연이 멀어졌으니까. 그 인연은 바로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경진이다. MBTI가 정반대였던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서로를 무척 독특하다고 생각했더랬다. 경진이는 어릴 적 힘들게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사업을 꿈꾸는 젊은이였고 예쁜 옷, 비싼 외제 차처럼 자신이 어릴 적 누리지 못한 물질들을 많이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반대로 나는 공무원이자 검소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경진이처럼 좋고 싫음이 분명하지만 최대한 절약하고 절제하는 삶을 좇아 왔다. 삼십 년 이상 다른 가치관을 지닌 채로 살아왔지만, 이제 우린 서로의 다른 가치관을 들여다볼 여유가 피어난 사람들이었기에 친해졌다. 화려한 꺼풀을 벗겨내면 약하고 불안한 어린아이가 웅크려 있던 경진이를 난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의 맞닿은 인연은 2년을 채 넘지 못했다. 경진이가 영영 먼 곳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자주 먹는 국수처럼 참 쉽게 다가왔다가 그만큼 쉽게 끊어진 인연은 참으로 허무하고 잔인했다. 인연은 내가 조종할 수 없을 때도 있으며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음을 처음으로 감각했다. 거짓말처럼 경진이 사라진 후 나는 너무나 힘든 마음에 스스로 가위로 내 인생의 모든 면발, 즉 인생에 깃들 희망과 인연을 헤집어서 끊어 버리려 했다. 하나의 면발이 톡 끊어져도 다른 면발이 있는데 나는 내 곁의 다른 인연들은 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탈출구라도 찾듯 한 라멘 가게를 방문했다. 그곳은 무려 일본에 있었다. 일본은 일본어로 일을 하며 출장, 여행을 자주 가서 익숙했지만, 갈 때마다 한국과는 또 다른 색다름을 느끼는 나라였다. 면 요리 애호가인 나는 예전부터 일본에서 라멘, 우동과 같은 면 요리를 먹었기에 이번에도 라멘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따뜻한 겨울면이라면 내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데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서.
일본 라멘을 주문하기 위해 종이에 가득 적힌 커스텀을 보았다. 면 굵기부터 곁들일 재료까지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호소멘을 좋아한다. 이는 일본에서 라멘을 주문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커스텀 중 하나인데, '호소멘'은 얇은 면을 뜻한다. 두꺼운 면도 좋아하지만 이날은 내가 잡고 있는 인생의 줄처럼 얇은 호소멘을 주문했고 곧 김이 폴폴 올라오는 라멘이 나왔다.
검은색에 가게 이름이 붉은색으로 박힌 그릇의 2/3 정도에 뽀얀 국물이 채워져 있었다. 돼지 뼈를 우려낸 돈코츠 라멘의 향은 언제 맡아도 식욕을 돋운다. 면은 내가 주문한 대로 얇지만 신기하게도 탱탱하다. 역사가 오래된 가게답게 이 라멘의 면은 치대면 치댈수록 탄탄하고 쫄깃해졌으리라. 여기에 살짝 올라간 매콤한 양념과 차슈, 잘게 썬 쪽파가 돈코츠 라멘의 국물, 면과 어우러져 멋들어진 한 그릇을 만들어 냈다. 보기만 해도 식욕과 놀라움을 자아내는 깔끔한 면 요리를 보니 내 인생도 이렇게 멋진 한 그릇 같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인생도 이 면발처럼 역사가 오래되고 많은 일을 겪을수록 더 탄탄해지고 깊이 있게 될까?
이번엔 커다란 스푼으로 국물을 한 번 먹으니 몸을 꽉 죄던 무언가가 쑥 빠지듯 긴장이 풀렸다. 이내 면발을 몇 가닥 집어서 입에 넣으니 바로 툭 끊어지지 않고 쫄깃하게 입안에 남아서 씹게 된다. 나는 가게의 카운터석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손님들도 별다른 대화 없이 오직 라멘에 빠져 있던지라 후루룩 들이키는 소리만 가게를 채웠다. 우리는 모두 모르는 사람이지만 후루룩 소리로 하나가 됐다. 모두 다르지만 겨울에 라멘을 통해 따뜻함을 얻고자 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겨울의 추위, 세상의 차가움, 끊어진 인연의 잔인함. 여러 차디찬 경험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한편, 돈코츠 라멘의 돼지 뼈 국물이 주는 묵직함과 면발의 꼬들꼬들함에 푹 빠져 먹다 보니 오로지 인간의 입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국수라는 존재의 소중함도 문득 느껴졌다. 지금까지 면 요리는 내게 셀 수 없이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그러나 내게 면 요리는 쉽게 찾을 수 있는 친구와 같아서 일이 바쁠 때, 이별해서 입맛이 없을 때, 국밥은 무겁게 느껴질 때 등 너무 허술하게 먹기는 싫고 만들기 귀찮을 때 찾는 음식이었다. 언제나 일상에 숨 쉬듯 존재하는 음식이어서 소중함을 잊고 당연시하는 서민 음식으로 여겼다. 면 요리 입장에서는 소중함을 몰라주어 섭섭했을 수도 있겠다. 나에게 경진의 존재, 경진에게 나의 존재도 처음엔 즐겁고 독특했지만 점차 소중함을 잃어 갔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지막엔 많이 다투었다. 이제 완전히 떠난 인연이 된 지금에서야 경진과 다툰 기억보다 행복했던 추억의 조각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경진도 차슈가 들어간 뜨끈한 라멘을 참 좋아했기에 함께 먹었던 추억과 함께. 소중했던 만큼 국수처럼 당연히 곁에 있다고 생각한 인연이 급작스럽게 뚝 끊겨 버린 순간은 실로 고통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 또 다른 것을 경험했다. 어떤 면발은 쉽게 툭 끊어지기도 하지만, 나를 지지하고 즐겁게 해 주는 다른 면발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고통은 또 다른 시작과 맞닿아 있음을. 경진을 잃은 고통은 내게 뼈아픈 반성과 현존하는 생물과 사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삶에 지쳐 내가 자신을 버리고 싶은 순간에 무척 감사할 만한 일도 함께 일어났다. 상실감에 빠져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일하고 삶을 영위하게 되는 순간은 찾아왔다. 경진이 떠난 후 나의 지리멸렬한 모든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고 따끈한 국수와 고기를 대접해 준 사람, 밤새도록 내 곁에 있어 주며 모든 선택을 지지해 준 사람도 있었다. 면발 하나가 툭 끊겼다고 모든 면발을 가위로 헤집어서 스스로 끊을 필요는 없었다. 하나가 끊어져도, 다른 소중한 면발은 반드시 있었다.
지금 내 앞에는 다시 인생의 지도를 펼칠 용기와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뜨끈한 겨울면이 놓여 있다. 국물, 면, 각종 재료가 어우러진 한 그릇이 내 인생도 다시 따뜻해질 수 있다는 용기를 티 나지 않게, 은은하게 전해 왔다. 사실 지금도 경진이 옆에 있는 것만 같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하다. 그러나 인연이 면처럼 끊어졌다고 눈물짓고 있지만은 않고자 한다. 갈수록 감칠맛이 감돌고 면이 탱탱해지듯 인생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성숙해지리라 믿으니까. 그리고 비로소 완성된 따뜻한 인생의 겨울면을 힘들 때 곁을 내어준 귀인들과 함께한다면 행복이 피어나리라. 시간이 흘러 인생 겨울면 만들기에 열중했던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될 날을 고대하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