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 밥
하루 종일 날씨가 흐렸다. 비가 올 듯 말듯한 회색빛 하늘은 반드시 누군가의 기분을 이유 없이 처지게 할 것이고 그 처진 기분의 주인공은 아마도 내가 아는 한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여지없이 퇴근길에 걸려오는 그의 전화를 피하지 못한 나는 그 기분에 동참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벌어진 술판에 털썩 자리를 잡고 이차를 큰 소리로 외치며 판을 키웠다. 그다음 날이 일주일의 한가운데 운 좋게 낀 휴일이라는 사실에 긴장의 사슬을 나도 모르게 스르르 놓고 만 것이었다.
다음날 눈을 뜨니 해는 중천이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오고 속은 덩달아 울렁거렸다. 다시 억지로 눈을 감고 숙취임에 틀림없는 이 얄미운 증상들을 잠재워 보려고 했지만 이미 깨어 난 그것들은 거칠게 반항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고 정신을 가다듬고 차가운 생수 한 잔을 쉼 없이 들이켰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양이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섰다. 매콤하고 자극적인 그 무엇으로 이 숙취의 후유증들을 화끈하게 씻어내고 말겠다는 해장의 의지가 발동했다. 간단하게 근처 편의점에서 매운 라면이나 한 봉지를 사려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좀처럼 가지 않던 중국집의 문을 열고 있었다.
빈자리에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운 내 몸을 풀썩 내려놓고 어색하게 식당 안을 둘러봤다. 그러다 옆 좌석의 아저씨들 앞에 놓인 희뿌연 김이 나는 시뻘건 국물에 시선이 꽂혔다. 매운맛에 약한 나에겐 늘 외면당했던 시뻘건 국물의 주인공인 짬뽕 밥을 나는 덜컥 주문했다. 넙적한 그릇에 수북하게 담긴 숙주와 각종 해산물 그리고 시뻘건 국물 사이로 흩뿌려진 계란들이 숙취로 흐리멍덩한 내 눈 안에 꽉 찼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조심스럽게 국물을 한술 떠 넘기고, 여전히 울렁거리는 뱃속을 진정시키며 밥을 말아 억지로 먹었다. 얼큰한 국물 탓에 금세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내 속은 바늘로 찌르듯이 뜨끔뜨끔했다. 그러나 흐르는 땀과 함께 내 몸속에 아직도 남은 알코올이 완벽히 제거되는 느낌이 들었고 매운 기운이 서서히 퍼지며 숙취에서 나를 깨어나게 했다.
식당을 나오자, 늦가을 속의 제법 매서운 찬바람 불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나의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순간,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큰하게 매운맛으로 숙취에 휘청거리던 나를 깨우던 짬뽕 밥 – 술로부터 나를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