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가 된다는 것

by anego emi



“왜 너의 영어 이름은 ‘준’이야?” 여행길에서 만난 이탈리안계 미국인인 그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나는 페퍼로니가 빼곡하게 올라간 손바닥만 한 피자 조각을 우물우물 씹으며 했다. “내가 6월생이거든.” 그는 내게 차가운 소다를 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실룩거리며 마치 그것이 불만인 양 말했다. “그런데, 너랑은 좀 안 어울린다. 촌스러워.” 그는 이탈리안 억양이 섞인 정확하고 투박한 발음으로 ‘old-fashion’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한국말로 고치며 유월이다. 유월이, 오월이, 사월이…. 사극 드라마에서 양반집 규수들을 모시는 종들의 이름으로 자주 등장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이든 미국이든 유행이 한참 지난 촌스러운 이름인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내가 ‘준’이라는 영어 이름을 쓰기로 결정한 데는 그것 말고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스물일곱 살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지금이야 어학연수가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아주 드물었다. 대리로 승진을 하고 그해 겨울, 사표를 냈다. 늦가을부터 IMF라는 쓰나미 같은 경제 위기가 턱밑까지 밀려오는 중이라는 뉴스가 간간히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설마 우리나라가…’ 하며 눈과 귀를 닫았다.


당시 한참 일에 독이 올라 있던 내가 영어 때문에 회의감을 느낀 게 발단이 되었다. 담당자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날아온 광고주 앞에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마치 개인 과외를 못 받아 더 높은 점수를 따지 못한 수험생처럼 분했다. 회사에서 죽이 척척 맞았던 동기 C와 퇴근 후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결심했다. ‘그래 까짓것, 1년이라도 영어 공부를 하러 가자. 돌아와서 다시 일하면 되지.’ 그리고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세 등등하게 사표를 냈고, C는 영국으로 나는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두 배가 넘게 오르는 환율 앞에 쪼그라들며, 지지리 운도 없음을 한탄하기 시작했고, 가난한 유학 생활의 서러움이 담긴 편지들을 서로에게 써 내려갔다.


그런 내게 희소식이 들렸다. 환율 때문에 어려워진 유학생들의 경제 사정을 감안하여 어학연수생들에게 학교에서 한 학기를 공짜로 다닐 수 있는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조건은 우수한 출석률과 성적, 그리고 장학금이 필요한 이유를 쓴 본인의 에세이가 필요하다고 했다. 당시 나는 갈 곳이 학교 밖에 없었기에 첫 번째 조건은 가볍게 통과되었다. 에세이는 그전에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는 한국 유학생에 조언을 얻었다. 우선 촉망받던 회사원이었던 내가 과감히 유학을 결심한 이유를 구구절절 쓰고, 내 꿈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영어공부를 어이없게 닥친 나라의 경제적인 재난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나의 미래로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세요’라는 공익광고 카피 같은 문장으로 끝맺었다.


내 에세이를 읽고 크게 감동한 분이 있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덕망 높은 영문학 교수로 쭉 재직해오시다가 퇴직 후 명예교수로 유학생들에게 영작문을 가르치는 분이었다. 일흔두 살의 여 교수님의 이름이 바로 ‘준’이었다. 교수님은 나를 자신의 이름으로 수여하는 전액 장학금의 주인공으로 선정했다. 무엇보다 감동스러웠던 것은 교수님의 편지였다. 장학금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통보가 담긴 페이퍼와 함께 하늘색의 편지 봉투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너의 미래에 부족하지만 내 응원이 담긴 작은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어떤 상황에도 도전을 서슴지 않은 너는 분명 멋진 여성이다. 너의 꿈과 너의 미래가, 너를 환하게 웃게 하기를….’ 나는 그 편지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말았다.


그 후로 나는 매번 이상한 발음으로 불리던 내 한글 이름을 ‘준’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바꿨다. 교수님의 진심 어린 따듯한 격려 덕분에 나는 6개월 만에 어학원의 가장 높은 레벨까지 단숨에 패스하고, 학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교수님은 분명 나의 미래를 위해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영어라는 날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진심은 누군가의 진심으로 더 견고해지고, 그 견고함은 흔들리지 않은 용기를 내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문득, 아마 지금은 하늘에 계실지도 모르는 준 교수님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졌다. 교수님이 달아준 날개 덕분에 나는 지금 또 다른 꿈을 위해 날아가고 있다고. 그때 내가 건네받은 날개처럼, 그 누군가의 진심을 나도 온 진심을 다해 응원하겠다고.




# 해결책

누군가의 멘토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력과 내공이 아니라, 진심 어린 관심과 마음이다. 그러니 내가 응원해주고 싶은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보자. 그런 좋은 일은 자주 할수록 내게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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