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레퍼런스

by anego emi



카피라이터로서 아이디어를 잘 내는 방법 중에 하나는 레퍼런스(참고자료)를 잘 찾는 것이다. 동영상일 수도, 한 줄의 글일 수도, 한 장의 사진일 수도, 한 곡의 음악일 수도 있다. 유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는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두루두루 찾아보면서 시작된다. 평소에 짬짬이 다양한 레퍼런스를 수집해서 자신만의 폴더에 두둑하게 담아놓을수록, 아이디어를 막힘없이 내는 게 수월해진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듯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만의 비밀 서랍에 숨겨놓은 경험과 이야기를 꺼내는 것과 흡사하다.


나는 신입 시절부터 레퍼런스 모으기에 부지런을 떨었다. 솔직히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공부를 한다는 명목에서였지만, 그것은 어느새 습관이 되었고, 집착이 되었고, 나만의 경쟁력이 되었다. 팀장이 되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나는 먼저 책꽂이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과 자료들을 스크랩 해놓은 노트들을 스캔했다. 이 프로젝트에 적절한 레퍼런스를 고르는 것이다. 나와 함께 생각을 정리하고 논리를 풀어갈 단초들을 아낌없이 내어줄 몇 권의 책과 노트가 내 손에 쥐어지면, 이 프로젝트의 절반은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러다 마땅한 레퍼런스가 떠오르지 않는 날엔 마냥 초초해졌다.


회사를 떠나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찾아놓았던 수많은 레퍼런스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를 지탱하게 했던 비밀의 폴더들이 휴지통 속으로 사라졌고, 레퍼런스가 없는 내 하루는 불안해졌다. 날마다 인터넷 서점의 메인 화면에 소개되는 신간을 뒤적이고 나보다 먼저 일을 떠난 선배들의 다음 행보를 추적해봤지만, 그럴수록 더 이상 그런 것들은 내 삶을 위한 레퍼런스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회사를 떠난 후 내 삶의 기준은 명확해졌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될 것. 그 하나면 충분하다.


무거운 철학이 담길 필요도 없고, 자아성찰 같은 깨달음을 얻지 못해도 괜찮다. 단지 일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내 하루를 죄책감 없이 즐겁게 누리는 법, 그동안 억눌렸던 내 마음이 흥얼거리는 콧노래에 귀 기울이는 법, 산만한 아이처럼 주변을 두리번대는 내 호기심을 꺾지 않는 법. 그런 것들을 위한 내 일상의 레퍼런스면 충분하다.


어떤 장소에 가서 커피를 마셔야 더 맛있게 느껴지고, 어디로 산책을 가야 기분이 두 배로 좋아지는지,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엔 어떤 음악이 어울리고, 기분 좋게 취해서 지인들에게 호기롭게 들려주고 싶은 시 한 편은 무엇인지, 내 일상의 바스락거림이 들리는 작지만 상냥한 레퍼런스들.


불안과 걱정을 피하기 위한 레퍼런스가 아니라, 깨알 같은 행복과 소박한 즐거움을 부풀리기 위한 레퍼런스들을, 나의 새 폴더에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것들을 날마다 하나씩 꺼내 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한 생활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지, 가슴으로도 깨닫게 되는 날을 고대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 남은생 Tip

자신만을 위한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맛집도 좋고 카페도 좋고 영화도 좋고 책도 좋다. 누군가의 의견을 배제한 오롯이 자신만의 감상과 의견이 100퍼센트 반영된 리스트를 만들고, 하루를 즐겁게 만들기 위한 영감이 필요한 순간 꺼내본다.


< 아네고 에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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