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냐고요? 아니요... 퇴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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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go emi



내가 하는 일이 천직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무작정 일을 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나를 그렇게 믿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믿음은 흔들리는 내 젊은 날의 가슴과 머리를 뜨겁게 했고 일을 향한 무모한 열정을 키우게 했다. 그리고 서서히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먹고 자는 일 외의 내 일상은 오로지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내 결정과 선택의 우선순위는 단연 일이 되었다. 그때 그것은 나에는 당연한 사실이었고, 일만 잘하면 나는 충분히 내 존재를 증명하며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연차가 쌓이고 실력이 쌓이고, 슬슬 내 목소리를 높여도 좋은 때가 왔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회사라는 곳은… 일만 잘한다고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요리조리 치고 빠지는 처세에도 능해야 하고, 억울하지만 타고난 운도 좀 따라주어야 하고, 남들에게 상처 주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잔인함 또한 갖춰야 했다. 그런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으려고 애쓰면서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함께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내가 천직이라 믿었던 일이 과연 이 짓이었을까’‘나는 정말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걸까’하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불 꺼진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남아서, 처음으로 내가 몸담았던 회사라는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너무나 익숙해야 할 공간이 너무나 낯설었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나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도망치듯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 결심했다. 일에 갇히 것도 모자라 내 전부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그리고 남은 생은 일에서 벗어나 나를 위해 살겠다고…


이 책을 일 때문에 까맣게 잊어버렸던 나를 찾아가는 유쾌하기보다는 씁쓸한 이야기이다. 어디를 가나 일 이야기밖에 할 이야기가 없었고, 하는 일 외에는 딱히 나를 달리 소개할 말이 없었던 내가, 중년이 다 되어 잊어버린 나를 찾겠다고 용기를 냈다. 무엇보다 일에 길들여져 꼼짝달싹 못하는 내 일상을 새롭게 고쳐야 했다. 하루 종일 시간이 생겨도 딱히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공허한 내 일상을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답도 안 보이는 내일을 위한 준비와 앞으로 먹고 살 걱정도 그만하기로 했다. 그저 일이 사라진 순백의 오늘이라는 내 일상에 집중하며, 나를 웃게 하고, 나를 기운 나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감동시키는 것들을 반복하면서, 일 때문에 꼭꼭 숨어버린 진짜 나를 찾아내고 싶었다. 나에게 일이 아닌 다른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앞뒤 잴 필요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죄책 감 없이 마음껏 하게 해주고 싶었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아도 좋았다. 내가 좋아서 그저 좋아서 집중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고 보람 있었다.


습관이 되어버린 일을 완전히 벗어던지기까지는 나만의 노력과 아픈 시간이 필요했다. 막막했던 그 순간들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지나갔다. (일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내려놓은 한결 가벼워진 내가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고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일 말고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차고 넘치는구나. 나는 이렇게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지금부터 ‘우리가 소유할 있는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라던 카프카의 명언처럼, 일상을 위해 하나하나씩 자유롭게 날개를 펼치기만 하면 된다고.’


PS. 일 말고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그래서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일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일 말고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용기를 내시길…




< 아네고 에미 >

- 브런치에 연재했던 제 부족한 에세이가 봄름 출판사의 도움으로... 일하지 않는 제 남은 생의 첫 책이 되었습니다. 제 글을 구독해주시는 독자님들과 봄름의 장진영 편집자님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도록 멋진 원고지가 되어준 브런치에게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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