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 먹는 소리는 그만

상추 튀김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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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고기 열 근 정도의 무게를 감량하고 날마다 슬림해진 몸매를 거울 속에 비춰보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오늘도 밤늦게 나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산 스몰 사이즈의 원피스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녀가 얼마나 살이 빠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군말 없이 환희에 찬 그녀의 목소리를 참아내며 냉장고에서 칼로리를 33%나 낮췄다는 라이트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그녀의 자랑 질에 서서히 짜증이 날 무렵, 좀처럼 빠지지 않은 나이 살이 골치 덩이인 나와 야식만 줄이면 다이어트는 껌이라는 통통한 그녀는, 날씬해진 그녀를 흔쾌히 맘껏 부러워해 준 대가로 고약한 심술에 가까운 작전을 세웠다. 즉, 그녀를 가을날의 산책이라는 미끼로 우리들의 아지트인 서촌으로 불러낸 후, 자연스럽게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의 가게들 앞으로 그녀를 유인해, 그녀의 잠들었던 식탐을 깨워 그전처럼 왕창 먹게 만들자는 엄청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오후 두 시경 경복궁 역 앞에서 만나서 통인 시장의 명물인 기름떡볶이로 그녀를 가볍게 유혹하고, 서촌 유명 빵집의 다양한 시식 빵들로 그녀의 줄어든 위를 자극한 후, 육즙 가득 한 소룡포와 튼실한 새우가 통 채 들어간 딤섬으로 그녀가 음식을 향한 긴장의 끈을 스르르 놓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소화도 시킬 겸 인왕산 초입의 공원을 한 바퀴 돌며 푸드 트럭의 갓 튀긴 매콤하고 달콤한 닭 강정으로 그녀의 입맛을 쭉 끌어올리고, 마지막으로 상추에 싸 먹는 바삭한 튀김으로 억눌렸던 그녀의 식욕을 사정없이 폭발하게 만들겠다는 ‘그녀의 식탐 해방’을 위한 빈틈없는 코스를 짜냈다.


드디어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 그날따라 날씨도 화창하게 좋고 햇빛도 노곤 노곤해서 산책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는 잘 입지도 않았던 짝 달라붙는 스키니 진에 허리의 곡선이 은근슬쩍 강조되는 하늘하늘한 얇은 니트를 입고 사푼사푼 우리 앞으로 웃으며 걸어왔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몰라보게 날씬 해졌고 팔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그녀의 홀쭉해진 배는 우리의 부러움 섞인 질투를 사기에 충분했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질투임에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녀 몰래 눈빛으로 사인을 보내며 우리가 짜 놓은 코스대로 그녀가 움직이도록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바람을 잡았었다.


우리는 맛있는 냄새가 여기저기에서 종합 선물세트로 터져 나오는 통인 시장을 가볍게 걷고 있었다. 통통한 그녀는 기름 떡볶이 2인분을 사고 긴 이쑤시개로 하나를 찍어 입 속으로 직행했다. 그런 통통한 그녀를 빤히 보던 그녀는 꿀꺽하고 군침을 삼켰다. 그러자 기름 떡볶이를 맛나게 먹던 통통한 그녀가 내 입에 떡볶이를 넣어주며 ‘맛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능청스럽게 지었다. 그다음 우리는 변함없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빵집으로 들어 가 인심 좋게 큰 덩어리로 썰어놓은 시식 빵을 하나씩 맛봤다. 한때 빵 순이었던 그녀는 계절 한정으로 나온 생크림 빵 앞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돌아섰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돌아서 제법 큼지막한 빵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시식 빵인데. 그 정도야 뭐…’하고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우리의 계획대로 한 조각의 달콤한 시식 빵이 굶주렸던 그녀의 위를 확실히 자극한 게 분명했다. 그녀는 길을 걷다가 통통한 그녀가 슬쩍 내민 떡볶이를 망설임 없이 먹었고, 세 개의 소룡포와 두 개의 새우 딤섬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인왕산 초입의 굴곡 없이 평평한 공원을 천천히 돌며 지금까지 우리가 먹은 것들은 이미 다 소모되었을 거라고 나는 쐐기를 박았다. 저 멀리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닭 강정을 파는 푸드 트럭이 보이자 통통한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재빨리 뛰어갔다. 동그란 종이 그릇에 수북한 닭 강정을 받아 들고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먹었다. 물론, 절반 이상을 이 닭 강정의 골수 팬인 통통한 그녀가 먹었지만, 그녀도 적지 않은 양의 닭 강정을 또 먹었다. 그녀는‘딱 하나 만’이라는 지킬 수 없는 간절한 약속의 말을 수시로 뱉어 내며 우리의 작전대로 그녀의 식욕을 깨우고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우리는 마지막 코스인 상추에 싸 먹는 튀김으로 유명한 분식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먹고 싶은 음식을 향한 저항의 지를 잃어버린 그녀는 내가 주문한 튀김에 납작 만두와 매운 떡볶이를 추가하는 범행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우리의 작전대로 참고 눌렀던 식탐을 다이어트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뭐든 맛있게 잘 먹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 가 있었다. 나는 도톰한 오징어 튀김을 상추에 싸서 그녀의 입으로 넣어주었고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었다.


며칠 후, 원피스의 사이즈를 바꿨다는 그녀의 맥 빠진 문자가 왔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다이어트 따위는 쌈 싸 먹는 소리라는 답을 보냈다. 이 나이에 모델로 데뷔할 것도 아닌데 먹고 싶은 걸 참아가며 일 년에 몇 번 입지도 못하는 원피스에 목을 매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을까? 그녀의 식탐에게 자유를 준 그날의 상추 튀김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살고 싶은 우리를 위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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