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라면
밤새 또 잠을 설쳤다. 어젯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가 문제였다. 어느새 팀장이 된 후배가 지인들을 모아놓고 벌린 술판에서 내 이름에 나왔고 누군가 내 목소리라도 듣자고 했던 것 같았다. 후배는 술김에 과감히 국제전화를 걸어 지금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시추에이션을 나에게 반쯤 혀가 꼬인 들뜬 목소리로 설명하고, 지인들을 차례로 돌아가며 바꿔주었다. 가벼운 안부인사로 시작해 각자의 근황이 오가고 마지막으로 그리움과 당부가 담긴 아쉬운 작별인사로 길었던 전화 한 통은 마무리되었다. 긴 통화로 뜨거워진 전화기를 내려놓자 나는 혼자만 저 멀리 유배를 온 것처럼 쓸쓸해졌다. 조그맣고 어두컴컴한 내 방이 감옥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그곳으로 어떤 모습과 어떤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음 날 집을 나와 학교로 가는 덴샤에 몸을 싣고 습관 저럼 또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따라 두꺼운 구름으로 덮인 흐린 하늘이 채워야 할 하얀 도화지 같았다. 덴샤에서 내려 학교로 걸어가는 익숙한 그 길에 봄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벚꽃의 가냘픈 꽃잎들이 봄비처럼 내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노트북과 물감, 스케치북을 쑤셔 넣은 커다란 보조가방을 움쳐진 양손에서 나도 모르게 힘이 빠졌다. 잠시 넋을 놓고 시끄러운 비명 소리를 내며 저 멀리 사라지는 덴샤를 초점 흐린 눈으로 따라갔다. 그 순간 휘청거리는 나를 흔들어 세운 것은 바로 나이가 지긋한 크로키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늦은 나이에 일러스트를 그리겠다고 유학을 온 나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 했고 또 두둑한 응원도 아낌없이 해주었다. 선생님은 무표정한 맥 빠진 내 얼굴을 보며 특유의 눈웃음 담아 찡긋하고 웃으며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 내가 자주 가는 아주 맛있는 미소라면 집이 있는데 말이야…”그리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선생님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허름하고 다섯 평 남짓한 자그마한 라면 집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구석자리에 털썩 앉자마자 미소라면 두 그릇을 큰 목소리로 주문하고,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한 모양새로 마주 앉은 나를 빤히 보며 빙긋이 웃었다. 나는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컵에 담긴 물을 수줍게 홀짝였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북하게 쌓인 미소 라면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자~ 맛있게 먹는 거야. 무조건… 이거 무지하게 맛있으니까.”선생님은 이 한마디를 나에게 건네고 후루룩 후루룩 경쾌한 소리를 내며 라면을 맛있게도 드셨다. 나는 선생님을 따라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라면을 억지로 입 속으로 밀어 넣자 갑자기 목이 뜨끔뜨끔 메어져 왔다. 나는 젓가락을 힘껏 움켜쥐고 이를 꽉 깨물었지만 눈시울은 금방 뜨거워졌다. 아마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줄곧 가슴을 짓누르던 부담감이 순간 바보처럼 북받쳐 올랐다. 난 힘없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런 나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묵묵히 지켜보며 라면을 드시던 선생님의 미소가 한없이 따뜻했다. 언제나 내편이 되어 주었던 선생님과 함께 한 벚꽃 비 내리던 날의 미소라면 –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에 감사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