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뱅이탕
요즘 잘못하면 패가망신의 지름길인 갑질. 그 갑질을 우린 참으로 잘 참았다. 지금과 달리 경기가 좋았던 그때, 갑질을 할 수 있는 자리의 사람들은 마치 선심 쓰듯 일거리를 던졌다. 우린 그것을 서로 먼저 받아내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자존심 따위는 저 멀리 내동댕이쳤다. 언제나 가장 낮은 자세로 갑질에 사정없이 휘둘림을 당하며 마냥 고통스러워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바로,‘광고회사’라는 멀쩡한 옷을 입은 ‘우리들’이었으니까.
퇴근 무렵 내일 오후까지 끝내야 하는 일을 마구 던지는 건 기본이고, 금요일 밤에 지금까지 진행하던 일을 막무가내로 뒤집고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을 가져오라고 패악을 부렸다. 심지어는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의 캠페인을 준비하는 애뉴얼 프레젠테이션 날짜를 크리스마스 다음날로 잡았다가 갑자기 새해의 첫 주로 변경하는 심술을 부렸다. 결국, 주말도 연휴도 우리와 같은 을에게는 허락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때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월급 받는 처지일 텐데 왜 그렇게 고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까지 이어지는 긴 추석 연휴를 바로 앞에 두고, 추석 전에 나가야 할 광고들로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우리를 위해, 우리의 갑은 추석선물처럼 일감을 바리바리 싸 들고 회사로 왔다. 그리고 웬일로 미안한지 회의를 끝낸 후 자신들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물론, 저녁이라고 하면 밥을 핑계한 술자리였다. 평소에 불편한 회식자리에는 절대 끼지 않는 나와 몇몇의 여자 동기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저것들을 오늘 완전히 보내 버리자.’
우리는 화장실에 모여 작전을 짰다. 우선 갑질의 탑 쓰리를 뽑았다. 그리고 그들 근처에 각각 자리를 잡고 술잔이 비면 바로 잔을 채우고 건배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마신 술은 물을 마시는 척하며 얼른 뱉어내고 상대방이 눈치챌 수 없도록 부지런히 수다를 떨며 분위기를 띄우기로 했다. 고기를 굽기에는 애매하게 늦은 시간이라 근처의 해산물과 골뱅이탕이 유명한 집으로 갔다. 우리는 작전대로 자리를 잡고 최대한의 평정 심을 유지하며 ‘취하면 지는 거다’라는 다짐을 하고 바짝 긴장했다.
어쩔 수 없이 을의 모범 답을 보여야 하는 팀장님의 건배 사를 시작으로 술판은 슬슬 무르익어 갔고 우리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작전대로 몇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신 갑 1은 서서히 혀가 풀리기 시작했고 제법 술이 센 갑 2도 우리들의 연이은 건배제의를 호탕하게 받아넘기더니 어느새 초점이 흐려졌다. 문제는 틈만 나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술을 권하기만 하는 갑 3이었다. 우리는 화장실을 다녀온 척하며 비어있는 그의 옆자리를 빠르게 차지하고 술을 권했다. 선배들도 우리의 작전을 이미 눈치를 챘는지 슬쩍 물컵을 밀어주거나 옆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갑질의 탑 쓰리는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선배들이 휘청거리는 그들을 택시에 태워 보내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깔깔댔다.
그들이 사라진 후 선배들은 우리의 작전에 완벽하게 무너진 그들을 고소해하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나는 선배들과 신나게 건배를 하고 이제야 생각이 난 냄비 속의 골뱅이를 젓가락으로 콕 찔러 돌리자 쏙 하고 속살이 빠졌다. 왠지 오늘의 통쾌함이 두배로 커지는 느낌이었다. 소심했지만 짜릿했던 복수의 마지막을 장식한 골뱅이 탕 – 그들의 반격이 살짝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