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 가락국수
일요일 오후 저녁 7시.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문 비장한 얼굴로 큰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회사로 향했다. 차가운 냉기가 도는 컴컴한 사무실에 불을 켜고 내 자리로 가 캐리어를 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단 무거운 책들부터 바닥에 깔고 파일 속의 자료들을 꼼꼼히 챙기고 손때가 뭍은 필기구들을 아무렇게나 던져 넣고 마지막으로 진초록의 방석과 줄무늬 무릎 담요를 쑤셔 넣고 캐리어를 힘차게 닫았다. 이것으로 영영 끝이었다. 이 회사와 나의 인연도. 나는 이 곳에서의 세월만큼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고 회사 밖으로 씩씩하게 나왔다. 바로 그때, 택시에서 내린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캐리어를 든 날 보며 ‘어?’하고 놀라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어제도 나와 긴 회의를 했던 기획팀 선배였다. 야반도주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는 나에게 선배는 차분하게 걸어오며 빙긋 웃었다. “야, 너 진짜 가는 거냐? 이렇게? ”그리고 내 손에서 캐리어를 황급히 낚아채고 내 얼굴을 빤히 보다 또 말했다. “너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나 급한 서류 하나만 보내면 되니까.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선배는 혹 내가 그냥 가버릴 걸 염려했는지 내 캐리어를 끌고 회사로 들어갔다.
정확히 10분 뒤, 선배는 내 캐리어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일요일 저녁이라 시끄러운 패밀리 레스토랑을 제외하고 마땅히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선배와 나는 근처의 포장마차로 갔다. 동네 술꾼들의 아지트로 보이는 포장마차에는 아직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거하게 취한 손님들이 제법 보였다. 구석에 놓인 새빨간 플라스틱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선배는 앉자마자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술은 아니라고 손을 흔드는 나를 힐끔 보며 또 빙긋 웃었다. 그리고 소주 한잔을 단숨에 삼키고 말했다. “너, 그렇게 가기로 맘먹은 거야? 나한테는 미리 말하지. 그랬음 내가 짐 싸는 거 도와줬을 텐데. 내가 너한테 그 정도는 되잖아?”나는 오른손에 살짝 거머쥔 소주잔을 무의식적으로 돌리다가 순간 멈췄다.‘그 정도란’… 도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걸까?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귀티가 흐르는 잘생긴 얼굴의 선배는 회사에서 인기가 많았다. 선배는 후배들에게 지갑도 잘 열고 자상하고 유모 감각까지 갖추었다, 그 덕분에 회사의 어떤 모임에서도 반듯이 부르고 싶어 지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같은 광고주를 맡은 덕에 자주 붙어 다녔고, 나는 선배가 사준 밥과 술을 수없이 얻어먹었다. 한때, 둘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지만 결코 그런 분위기로 이어질 만한 로맨틱한 사건은 우리 둘 사이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늦은 밤에 괜찮다고 우기는 나를 집까지 태워준다 던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허공을 보며 멍해질 때마다 내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문제점을 함께 찾아준다 던가, 한밤중까지 이어진 마라톤 회의를 끝낸 후에 거품 가득한 카푸치노를 슬쩍 쥐어준다 던가… 그에게는 후배를 향한 따사로운 친절에 불과한 별일 아닌 일들에 가슴을 콩닥거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선배에게는 생일 때마다 DHL로 선물을 꼬박꼬박 보내오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여자 친구가 있었고 곧 그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 날 거라는 이야기를 여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번 들었다. 소위, 내가 넘볼 수도 넘봐 서도 안 되는 이미 ‘임자 있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소주 반 병을 순식간에 비운 선배는 나를 빤히 보며 특유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괜스레 쑥스러워진 나는 급히 소주잔을 비웠다. 선배는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네가 없는 회사는… 좀 서운할 거 같다. 좀 더 같이 너랑 있고 싶었는데… 진짜 아쉽다.”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후배에게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란 걸 나는 뻔히 알면서도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선배는 턱을 괴고 아까보다 흐릿해진 눈빛으로 내 얼굴을 지긋이 봤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아 배고프다. 선배, 가락국수 먹을 꺼지?”하고 말하고 가락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나는 선배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에 면을 돌돌 말아 최대한 새침하게 가락국수를 먹었다. 지금 가락국수를 먹는 내 모습이 선배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선배는 물끄러미 보다 자신의 가락국수 면을 휘저으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아마도… 네가 많이 보고 싶을 거 같다.”
다음 해 선배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힘든 회사생활에서 남자 친구처럼 나를 보살펴 주었던 선배와 먹었던 포장마차 가락국수 – 나도 보고 싶을 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 아네고 에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