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도네와 컵케이크
자그마한 체구에 볼수록 귀티가 나는 앳된 얼굴, 아이처럼 크게 소리를 내며 잇몸이 보이도록 환하게 웃는 그녀는, 눈가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주름마저 근사하게 보일 만큼 매력적이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그녀는 남자보다, 명품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적당한 산도와 과일 향이 어우러진 청량한 샤르도네와 달콤한 생크림을 듬뿍 올린 앙증맞은 컵케이크였다. 오늘따라 햇살이 포근한 날씨가 너무나 좋아서, 하루 종일 마음먹고 쓸고 닦은 집이 궁전처럼 빛나 보여서, 모처럼 간 헬스클럽의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이 모습이 근사해서…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수많은 그런 날이면, 그녀는 단골 컵케이크 가게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스트로베리 컵케이크와 양 볼이 통통한 여사장님이 권해주는 오늘의 컵케이크를 사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왔다. 그리고 틈틈이 세일 때마다 구입해서 그녀의 보물창고에 고이 모셔둔 샤르도네 한 병을 냉장고에 넣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샤도네이가 차가워질 동안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한 톤 높아진 목소리의 틈을 타고 간간이 들리는 ‘오마라’의 노랫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면, 나는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샤도네이와 컵케이크의 시간임을 눈치챘다.
그런데 이렇게 매력 넘치는 귀여운 애주가인 그녀를 위협하는 대단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한밤중에 배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침대 위를 뒹굴 다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진 언니는, 엉기적엉기적 기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간신히 집어 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119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에 들이닥친 이름 모를 청년들의 가물가물거리는 얼굴을 향해 간절한 구원의 손을 내밀며 기절을 했다. 그러다 잠깐 희미하게 정신이 들면서 흐릿한 얼굴들 중의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이 사정없이 엉클어진 머리에 앞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친 꽃무늬 잠옷 바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런 모양 빠진 추한 독고 노인의 꼬락서니로 들 것에 실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인생 굴욕에 가까운 창피스러움을 느꼈다.
언니는 이틀간의 입원과 회복기 내내 허연 죽을 먹으며 자책의 시간을 가졌고, 이런 망신스러운 일이 다시는 그녀의 남은 인생 속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몇 주 후, 모처럼 언니의 집으로 놀러 온 나와 지인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나, 샤르도네를 끊어야 할지도 몰라. 아니, 끊어야 해.”작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는 그런 대단한 결심을 한 언니의 상태가 걱정되는 한편, 이제는 더 이상 그녀와 마실 수 없는 샤르도네 생각에 애인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받은 것처럼 서글픈 기분마저 들었다.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진 이 시간이면 언니가 사랑하는 몽글몽글 물방울이 맺힌 차가운 샤르도네와 종류별로 다양한 컵케이크가 등장하고도 남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삐죽하게 입을 벌린 바지락들이 뒹구는 봉골레 스파게티와 얼음을 가득 채운 레모네이드를 식탁 위에 차려 놓았다.
언니는 예상 밖의 요리에 꿈쩍도 않는 우리를 둘러보며, 스파게티 위에 수북이 쌓인 바지락의 속살 발라내며 말했다. “너희들도 이제, 술 끊던지 확 줄여라. 안 그럼 내 꼴 난다.” 술에 관한 어떠 매서운 잔소리에도, 유럽 사람들에게 음료수에 불과한 샤르도네 라면 아무런 문제없다고 꿈쩍도 않던 언니에게 아마도 예고 없이 찾아온 ‘한밤의 119’라는 망신스러웠던 해프닝은 꽤나 충격인 듯했다. 언니는 나이가 드니 점점 끊어야 할 게 늘어간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울컥해진 나는 선물로 가져온 언니가 프랑스 유학시절에 즐겨 마셨던 샤르도네 한 병을 슬며시 가방에서 꺼냈다. 그런 나를 보며 또 다른 지인은 쇼핑백 속에 얌전히 숨겨놓았던 컵케이크를 꺼냈다. “그래, 언니 말이 백번 옳아. 언젠가 끊어야지. 그래도 언니, 오늘은 말이야… 대단한 이색 체험 후에 살아 돌아온 언니를 위해서 마지막 축배를 들게.”하고 나는 제법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언니가 꺼내 온 와인 잔에 나는 샤르도네를 따르고, 레몬에이드 잔을 만지작거리는 안타까운 눈빛의 언니를 향해 잔을 들었다. 입안 가득 청량한 향이 넘치고 씹을 필요도 없는 부드러운 컵케이크가 사르르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그런 나를 언니는 야속하다는 듯이 부러운 눈으로 처다 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토록 언니가 사랑했던, 언니만큼 매력적인 샤르도네와 컵케이크 – 결국 그날, 천천히 비운 마지막 한잔을 끝으로, 샤르도네와 영영 이별한 언니를 위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 아네고 에미 >